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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Nov 01. 2023

연설하는 소크라테스

040: 플라톤의 『메넥세노스』를 읽고……

기원전 5~4세기 경, 그리스에선 두 집단(?)이 사상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소피스트들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자들입니다. 그런데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봐도 혼동할 일이 아닌데도,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를 구분하려 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많은 면에서 두 집단이 보이는 유사성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 누구든 닥치는 대로(?) 붙들고 늘어집니다. 그곳이 광장이든 체육관이든 혹은 길거리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대화를 나눌 상대자만 있다면 그 어디라도 상관없었다는 얘기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유사한 형태의 대화술을 구사합니다.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는 상대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녹초가 되게 만들곤 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두 집단의 목적은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대화 상대자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몰아붙입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모든 악의 근원이 무지에서 온다고 보았고, 바로 이 무지의 상태가 아이러니하게도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출발점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소크라테스는 논리를 펼쳐감에 있어 종횡무진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에 비해 소피스트들은 자신의 논리를 펼치는 데 있어 그 중심점을 찾기가 힘듭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대화 상대자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집단이라는 것, 그들의 지식을 이용하면 세상을 보다 더 지혜 있고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인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고 나면 세상을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기술(예를 들어 논쟁술이나 연설술 따위)들을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가르치게 됩니다.


아마도 플라톤이 스물여섯 편의 대화편들 속에서 굳이 소크라테스를 등장시켜 논리를 이끌어 가게 된 것도, 그렇게도 훌륭한 자신의 스승을 고작 소피스트 따위와 혼동하는 모습에 플라톤이 분개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주목할 점은 역설적이게도 정작 저자인 자신의 이름은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건 4년 전엔가 직접 읽어 본 스무 편의 대화편들 속에서 제가 직접 확인한 바입니다.


어쨌거나 이번 대화편에서도 역시 소크라테스가 등장합니다. 이제 한창 성인이 되어가는 시점에 접어든 메넥세노스와 대화를 나누는데, 소크라테스는 난데없이 메넥세노스에게 화부터 내고 있습니다. 이유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메넥세노스가 소크라테스와 대화하기에 앞서 평의회 의사당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메넥세노스가 어느 정도 교육도 받았고, 살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몇몇 기술들도 익혔으니, 이만하면 정치에 뛰어들어도 되지 않겠느냐, 하는 내심을 소크라테스에게 비친 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메넥세노스는 한사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정치에 뛰어들 심산으로 그곳에 간 게 아니라 전몰자를 위한 추도 연설이 곧 있을 것이라는 사실과, 누가 그 연설을 맡을 것인지에 대해 궁금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늘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동경해 마지않는 메넥세노스는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다분히 도전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메넥세노스 : 선생님 자신께서도 연설을 잘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만약 그럴 필요가 있고 또                     평의회도 선생님을 뽑으려고 한다면 말이에요.
소크라테스 : 적어도 나로선 그렇다네, 메넥세노스. 내가 연설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뭐 놀랄 거야 없지.
                 왜냐하면 나에게는 연설 기술에 비범한 능력을 지닌 여선생님이 계시거든. 게다가 그분은
                 많은 사람들을 훌륭한 연설가로 키우셨다네. 특히 한 사람, 즉 그리스 사람들 중에서 가장
                 걸출한 연설가인 크산티포스의 아들 페리클레스 역시 그분이 키우셨지. ☞ 본 책, 59~60쪽    


여기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여선생님은 바로 아스파시아를 말하는데, 미모와 재능을 갖춘 명문가 출신의 여인으로 페리클레스의 애인이 되어 그의 자식까지 낳은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 본 대화편 말미엔 페리클레스의 연설문을 실어 놓았습니다. 굳이 아스파시아를 거론하면서까지 어쩌면 생애 처음으로 연설을 하고 만 소크라테스의 것과 비교해 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일평생 연설자들을 희롱(?)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들이 그렇게도 자신 있게 이야기하던 세상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기술인 연설술을 두고, 소크라테스는 단호히 그건 그 어떤 기술도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플라톤의 또 다른 대화편인『고르기아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항입니다. 풍성한 말잔치로 대중들을 매료시키는 것이 연설술이긴 하지만, 연설이라는 것 자체에 감히 '술'이라는 말을 갖다 붙일 수 없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기술이란 것은, 사태의 원인을 밝히고 설명을 제시하는 기능을 하지만, 연설술은 어림잡는 데 능숙한 혹은 익숙한 경험 내지는 숙달된 솜씨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연설에 능한 사람들이 그토록 주장하는 모든 앎(지식)의 원천을 제공해 주는 것이 연설이라는 말에 대해, (연설) 전문가들이 대다수 아마추어들의 뜻에 좌우되는 상황이 연설 상황이고, 이것은 곧 '모르는 자가 모르는 자들 앞에서 아는 자보다 더 설득력이 있게 되는' 상황이라며 꼬집습니다. 바로 그러한 연설술은 도덕적인 앎을 포함하고 있지 않는데, 그런 연설이 어떻게 공적인 일에 기여할 수 있겠느냐며 소크라테스는 지적합니다.


그렇게 확고한 신념을 가진 소크라테스가 드디어 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연설이라는 게 뭐 대수야, 혹은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하는 태도나 실컷 연설을 다 하고 난 후, 메넥세노스에게 어디 가서 절대 자신(소크라테스)이 연설을 했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신신당부하는 모습 등은 조금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     


메넥세노스 : 소크라테스 님, 정말 나는 너무도 이 연설에 대해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당신에게 말해
                 주신 분이 그분이시건 누구이시건 간에요. 게다가 그밖에 여러 가지 점에서도 그것을 말해
                 주신 분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 좋아, 그러나 나에게서 들었다고 발설하지는 말게. 다음에 또 내가 자네에게 그녀에게서 들은  
                 여러 가지 훌륭한 정치 연설을 들려줄 수 있도록 말이야.
메넥세노스 : 염려하지 마세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니 꼭 들려주세요.
소크라테스 : 그래, 그렇게 해 줌세. ☞ 본 책, 85쪽     


어찌 되었거나 본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연설을 제대로 접해 볼 수 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는 책으로 보입니다. 역자들의 표현대로 다른 대화편들과는 달리 뚜렷한 철학적인 면모들을 볼 수 없다는 흠은 있지만, 진정한 현자는 자신을 배척하는 이들이 가진 기술(?)도 구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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