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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Nov 02. 2023

미(美)는 무(武)보다 강하다.

041: 야마모토 겐이치의 『리큐에게 물어라』를 읽고……

이 책은, 임진왜란의 원흉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역사 속에 의문사로 사라져 간 그의 다인(茶人)이었던 센 리큐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사실 차(茶)의 세계라는 제게 생경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바람 가득 이는 고즈넉한 공간에 처연하게 앉아 부엌에선 불 위에 올려놓은 차 주전가가 끓는 소리를 들으며 책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는 그런 착각 말입니다.

 

작품을 읽기 전에 먼저 리큐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들 것 같습니다.

리큐는 오다 노부나가(16세기에 일본 통일을 먼저 꾀했었던 사람)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우리에겐 어쩌면 '풍신수길'이란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는)에 봉사하며 다도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으며 히데요시에게서는 봉토를 받았다. 항상 히데요시의 측근에서 차에 관한 모든 일을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와 외교에도 참여하여 은연중 권세를 누렸다. 60세경부터 새로운 각도로 연구하여 다사(茶事) 개혁에 전념하여 그가 좋아하는 취향이 천하에 풍미하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의 문하에 들어왔다. 그러나 1591년 히데요시와 충돌하게 되어 결국 처벌을 받아 할복했다. 자신의 목상(木像)을 절에 안치했다는 것과 자작한 차도구가 비싼 값에 팔린 것이 처벌의 구실이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그는 기골이 있는 순수한 예술가이고 해학성이 풍부한 인물이라고 평가된다. 그는 주코 파 다도의 깊은 뜻을 연구했으며, 새 시대에 맞는 다도의 취향을 개발하고 다도의 이론도 대성했다. 리큐는 주인과 손님의 마음이 일체가 되어 다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다도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중략)……다도에는 부귀비천(富貴卑賤)의 차별이 없고 모두 인간으로서 평등하다고 했다. 다도를 통해 인간생활의 진정한 가치를 느끼고 화목의 묘미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그가 확립한 다도의 이념이었다. ☞ 다음 백과사전, '센 리큐' 항목에서 발췌     

이쯤에서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영어 속담이 하나 있었습니다.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문은 무보다 강하다, 위대하다.)

그렇게 본다면 이 책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The tea ceremony is mightier than the sword."

바로 그 속에 도요토미 히데요시(the sword)가 있었고, 센 리큐(the tea ceremony)가 있었습니다.


히데요시는 혼란한 일본 정국을 통일한 사내입니다. 그런 위치에 있었기에 그가 원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그의 손안에 들어와야 했습니다. 그의 휘하에서 다사를 총지휘했던 리큐는 그 따위 천박한 대머리 쥐새끼 같은 놈인 히데요시에게 다른 건 몰라도 미 의식만큼은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늘 그런 생각들로 마음에서만큼은 철저히 그를 거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네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통감시켜 주고 싶었다.
천하를 움직이는 것은 무력과 금전만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에도 힘이 있다.
천지를 뒤흔들 힘이. ☞ 본 책, 11쪽     

하지만 그런 센 리큐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던 점은, 천박하기 짝이 없던 히데요시였지만, '저속하고 야단스러운 취향이지만 그것도 극치에 이르면 탈속, 초속의 경지와 통했다는 것을, 그것이 또 얼마나 대단한지를 목격하고 감탄한 적도 있을 만큼의 그런 대단한 사내라는 걸' 말입니다.


자신의 목상을 절에 안치했다는 것과 자작한 차도구를 비싼 값에 팔아 다도의 본질을 흐렸다는, 이치에도 맞지 않는 억지 누명을 뒤집어 씌워 자신을 죽이려는 히데요시에게, 리큐는 조금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목상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목상은 어디까지나 절 측에서 막대한 기부자이자 후원자였던 리큐를 기리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지만, 그래서 주지가 백방으로 그의 구명을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그를 어떻게든 숙청하려고 덤벼드는 히데요시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리큐가 제대로 할복하는지 지켜보기 위해 내방한 무사들이 전한 메시지인,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그저 머리를 숙이는 시늉만 해라. 그러면 전부 용서하겠다. 유감은 남기지 않겠다.( 본 책, 23쪽 )'는 히데요시의 전언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고 결국 리큐는 할복의 길을 택합니다.

진정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 어떤 짓밟힘이나 강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정말 '너 따위 쥐새끼 같은 놈이 어떻게 한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흐려질 미의 본질이라면 애초에 그걸 추구하면서 일평생 살아오지도 않았을 거란 집념'을 스스로 지켜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이 모든 트집의 시발점은, 리큐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녹유 향합을 이미 오래전에 히데요시에게 들키고 만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녹유 향합은 처음으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준 조선의 한 여인이 남기고 간 유품이었습니다. 그 향합 속엔 젊은 시절, 그가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지켜주려 했었던 여인의 새끼손가락 뼈와 손톱이 담겨 있던 물건입니다. 누군가의 그저 성 노리개 감으로 팔려갈 운명이었던 너무도 아름다웠던 조선의 여인을 지켜 주지 못해 끝내 그녀가 자결하게 되었고, 두 사람을 잡으러 온 무사들에게 시신이 넘겨지기 전에 리큐가 스스로 그녀의 손을 물어뜯어 남몰래 오십 년을 간직해 온 유품이었으니 누구에게도 공개할 수 없었고, 더군다나 히데요시 같이 천박한 인물에겐 더더욱 가당치 않은 일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참 의문스러운 건, 그렇게 천박하다고 마음속에서 경멸하곤 했던 히데요시 역시 나름의 미적인 안목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혜안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겠습니다. 그래서 결국엔 일본 천하를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히데요시와 리큐가 추구하는 미의 본질은 분명히 다른 것이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히데요시와 리큐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자신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것에는 무서울 정도로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리큐의 아내인 소온은,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면 당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도 능히 사람이라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정도이기도 했으니까 말입니다.


절대 권력과 무력을 상징하는 히데요시와 미의 세계를 상징하는 리큐는 분명 언젠가는 부딪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지배와 피지배 관계 속에 놓인 그들이라 해도, 그건 피해 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아름다운 것이든, 실리적인 것이든 천하 일인자의 위치에 있으니, 그 모든 것을 소유해야 직성이 풀리는 히데요시의 끈질긴 요구와 강압과, 어떤 이유에서든 미의 세계와 그 본질을 추구하려는 자신만은 히데요시조차도 감히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라며 버티는 리큐의 싸움은, 작품 전반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게 할 정도입니다.


애초에 두 사람은 싸움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일평생 한 여자를 마음속에 품고 있음을 내내 짐작해 온 리큐의 아내인 소온이, 남편이 할복 후 그의 품에서 꺼낸 녹유 향합을 깨뜨리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그래서 할복 후 어떻게 해서라도 향합을 가져오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무사들은 수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굳이 승자가 누구냐며 손을 들어주라면 저는 리큐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자결했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그의 정신은 후세에 남아 일본의 다도를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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