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F.M. 콘퍼드의 『쓰여지지 않은 철학』을 읽고……
인문학이라고 하면 주로 문사철이라는 말로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문사철은 문학, 역사, 철학을 줄인 말인데, 나름 개념을 생각해 본 바로는 아마도 각 시대의 특징적인 생각이나 그러한 흐름들을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런 철학이 밑바탕이 되어 시공간 속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을 역사라고 할 수 있을 테고, 그런 철학과 역사가 녹아든 저작들이 세기를 아우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거라는 것입니다.
꼭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그리 보면 세계와 인간을 잘 이해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철학적인 이해가 밑거름이 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늘 마음만 품고 왔던 철학 서적을 언젠가부터 틈틈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읽는다고 당연히 전부-전부는커녕 3분의 1 정도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면 그나마 읽은 보람은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우연찮게 책꽂이에서 발견한 이 책이 그간에 읽어 왔던 책들에 대한 튼실한 길잡이가 되고 있어 반갑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철학에 대한 선 이해가 없다 보니 닥치는 대로 읽자는 생각부터 들어 우선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먼저 읽었습니다. 이어 『소피스트』,『크리톤』,『시학』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런데『시학』을 읽다 보니 아무래도 순서대로 읽는 것이 이해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될 것 같아, 소크라테스의 사상부터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는 단 한 편의 저작도 남기지 않았던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들여다보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입을 빌려 충실하게 여러 대화편을 남긴 플라톤의 저작들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으로,『파이드로스』,『메논』,『국가』,『향연』, 그리고,『파이돈』을 읽게 되었습니다. 읽는 중간중간 어떤 부분들은 대체로 공감하기도 했지만, 많은 부분들에 있어서 이해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나게 된 이 책이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 책에는,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드로스』,『국가』,『향연』, 그리고『파이돈』등에 대한 언급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위에 언급한 저작들을 읽지 않았다면 이 책 역시 저에겐 뜬구름 잡는 소리나 다름없었겠지만, 아직은 그래도 제겐 어려운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나름 명쾌하게 개념이 정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만일 제도가 나쁘다고 생각한다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소용없거나 자신의 죽음을 가져오지 않는 한 그는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그는 혁명적인 폭압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것이 취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책일지라도, 그는 행동을 참고 자신과 그의 국가를 위해 최선의 길을 기원해야 한다."
그것이 플라톤 자신이 마지막으로 취한 길이다. 오랫동안 고통을 겪으며 결정하지 못했던 그는 마침내 민주주의 상태를 지닌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결코 바꾸지 않았다. 아카데미로 그가 물러났을 때, 마치 아카데미의 교정이 에피쿠로스의 교정이었던 것처럼 민회와 시장에서 일어났던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인다. ☞ 본 책 95~96쪽,「플라톤의 국가」中에서
젊은 시절부터 정치적인 야망이 있었던 플라톤이 종국엔 그 꿈을 접고 철학자의 길을 걸어간 결정적인 이유였던 것으로 보이는 부분입니다. 물론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죄도 없이 독배를 마시고 세상을 하직한 것에 크나큰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철학자의 길을 선택했다고 하지만, 아마도 이 역시 중요한 이유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집필한『국가』는, 비록 정치적인 야망은 버렸지만 꿈에서라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진정한 정치가의 자질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아카데미(아카데메이아)에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시칠리아의 첫 방문에서 돌아오자, 플라톤은 아카데미를 세웠다. 그 자신의 과제는 이 학교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지도하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희랍 전역에 걸쳐 자질을 갖춘 정치가가 퍼져나가도록 원칙을 수립하면서, 계속해서 소크라테스식 대화편을 써나갔다. 이 저작들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알리고 학생들을 아카데미로 끌어오는 두 가지 이점이 있었다. 이 부분의 대화편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것이『국가』편이다. ☞ 본 책 99~100쪽,「플라톤의 국가」中에서
이런 점으로 봤을 때, 그때나 지금이나 진정으로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했던 환경적인 배경들은 대동소이했나 봅니다.
『국가』편의 끝 쪽으로 오면서 플라톤은 지혜가 인간사회에서 진정으로 존경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점점 더 의심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 당시부터 인간의 복리를 위해 책임을 맡았던 왕이나 지배자들의 오랜 집권과정을 보면, 우리는 그런 의심이 오히려 정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 본 책 109쪽,「플라톤의 국가」中에서
하지만 그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습니다. 철학적인 자질을 갖춘 지배자, 소위 철인왕이 등장하게 될 그날을 꿈꾸며 어쩌면 그의 스승처럼 지혜에 대한 길고 긴 여정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일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철학이고, 반면 플라톤의 철학은 저 세상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고 믿는 것이 옳다면……. ☞ 본 책 122쪽,「플라톤의 <향연>에 나타난 에로스」中에서
아마도 이 친절한 길잡이꾼의 말을 믿는다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의 특징을 단 한 마디로 요약해 주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