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 두 번째 글: 이제 그만 보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To. the One 1mm blue.
생각해 보니 너라는 존재가 나와 함께 한 지 벌써 32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 물론 처음 너의 이름은 내게 88 라이트였다. 그러다가 겟으로, 심플로, 또 타임이라는 이름을 거쳐 어느새 지금의 네 이름으로 나와 함께 하게 되었다.
아내와 함께 산 지 22년, 아들과 산 건 20년, 그리고 딸과 산 건 17년인 걸 감안하면, 아마도 넌 세상의 그 어떤 존재보다도 가장 나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녀석이었던 것 같다. 이유가 어쨌건 간에 그간의 너의 공로를 내가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구나.
내게는 첫 여인이었던 미영이와 두 번째 여인이었던 현주를 1달 안에 둘 다 잃어버렸을 때, 그 어떤 존재보다도 사실 큰 위안이 되었던 건 너였다. 다시는 사랑할 수 없었을 것 같았던 내게 용기를 주고 시간이 지나 다시 또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을 수 있었던 것도 네 역할이 명백히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이미 나는 성인의 나이였으니 웬만한 곳에서든 너를 한 개비 꺼내어 불을 붙인다고 해서 큰 비난거리는 되지 않았다는 것이겠다.
물론 중간중간에 너와 이별하고 싶은 순간도 없지 않았지만, 10여 년을 근근이 너와 동고동락하는 동안 난 학교에 발령을 받았고, 또 지금의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특히 학교에서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너의 도움이 정말 컸다는 걸 몇 번이고 인정하고 또 인정한다. 순간 욱, 하는 감정이 올라와 아이를 쥐어박으면 신문에 대서특필할 요즘 같은 때, 속에서 불이 올라올 때 일단 그 자리를 피하고, 밖으로 나와 너에게 불을 붙이면 거짓말처럼 분노가 사그라들곤 했다. 사실 24년이라는 오랜 교직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너의 지분도 있다고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게다가 너무도 완벽하고 철두철미한 지금의 아내와 함께 살면서 몇 번이고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어쩌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며 살 만한 힘을 준 것 역시 네가 아니었을까 한다. 아마 하늘이 꾸무리했던 날인 걸로 기억한다. 멀쩡히 있다가 죽겠다고, 이제 그만 살겠다고 하며 집을 뛰쳐나갔을 때에도 내 발길을 다시 한번 붙들어 준 것 역시 너의 힘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아내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감히 넘어설 수 없는 존재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네가 믿을지 모르겠구나. 아내는 지금껏 내 앞에서 단 한 번도 자기 입 밖으로 꺼낸 말에 대해 책임질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언행일치의 전형이라고 보면 딱 맞을 것 같다. 물건이라는 것은 반드시 원래 있던 그 자리에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하든 처음과 같이 완벽하게 아귀가 맞아야 용납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성격이었으니 지극히 낭만적인 내가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맞다, 그때마다 너는 내게 적지 않은 힘이 되어 주었다. 누군가가 내게 나약해 빠졌다고 해도 상관없다. 사실은 분명히 그랬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 너에게 이제 이별을 고하려고 한다. 마음 같아선 감사패라도 주고 싶지만, 내게 큰 위안과 힘이 되어 준 것 못지않게, 그동안 알게 모르게 내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었을 너에게 감사패까지 주지는 못할 것 같다. 물론 내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은 점에 대해 너에게 원망 따위의 마음 같은 건 없다. 네가 스스로 나를 찾아온 게 아니라, 편의점으로, 슈퍼로, 그리고 작은 구멍가게로 너를 사러 한달음에 달려간 건 나였으니까 말이다.
이제는 내 힘으로, 내 의지로 나 자신을 일으켜 세워 보려 한다. 더는 네 힘을 빌리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 무려 32년 동안 나와 함께 하면서 내가 힘들 때마다 내게 힘을 준 그 공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생각이다.
우리, 너와 나, 이제는 이쯤에서 깔끔히 헤어지자꾸나. 서로 미련 갖지 말고 깨끗이 갈라서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