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 스물세 번째 글: 멋진 개꿈
어제는 잠을 참 달게 잤습니다. 게다가 꽤 깊이 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과학적으론 상식을 뒤집는 소리입니다. 매일 꿈을 꾸는 게 사람이라지만, 어떤 책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자고 일어나서 간밤에 꾼 꿈이 고스란히 기억이 난다는 건 잠을 설친 증거라고 했습니다. 뭐, 그렇거나 말거나 제 느낌으론 정말 잘 잤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합니다.
더군다나 꽤 흥미로운 꿈을 꾼 뒤라 혼자 흐뭇해하며 꿈을 복기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꿈속에서의 제 활약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동안 무심코 시계를 봤습니다. 8시 50분! 하마터면 입에서 욕이 튀어나올 뻔했습니다. 이 시각이면 이미 몸은 교실에 있어야 할 때였으니까요. 미친놈 널을 뛰듯 푸닥거리며 준비를 마치고 지하철에 오르니 9시 15분이었습니다.
사실 꿈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꿈속에서 제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엄연히 배경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한적한 시골길이었습니다. 갑자기 눈앞에 어마어마하게 큰 독수리 한 마리가 날개를 접으며 제 앞에 내려앉았습니다. 혹시나 저를 해칠까 싶어 몸을 움츠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왕자님! 빨리 타세요. 공주님을 구해야 해요."
난데없이 무슨 소리인지 의아해했지만, 일단 독수리 등에 올라탔습니다.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르는데 날개 길이만 해도 족히 10m는 넘어 보였습니다.
독수리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자 주변의 풍경이 일제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아주 멀리 뾰족이 솟아 오른 유럽 중세시대에나 볼 법한 커다란 성이 보입니다. 주변의 밭에선 열심히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안데르센 동화에나 나올 것 같은 유럽 어딘가의 조용한 시골 마을 같았습니다. 일을 하던 농부들은 그 거대한 독수리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고, 하나같이 모자를 벗고는 독수리 등에 올라탄 제게 경의를 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모두 처음 보는 이들이었지만, 분명 그들은 처음부터 저를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독수리와 저는 어떤 얘기를 끊임없이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독일어 같았습니다. 꿈을 꾸면서도, 이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성에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 아래를 내려다보니 온갖 맹수들이 전속력으로 제가 가는 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독수리의 외마디 소리를 듣고 모여든 동물들이었습니다. 신기했던 건 꿈속에서 겪게 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들에 흥미를 느끼기보단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공주를 구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사명감에 불타오르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삼엄한 경비, 성에 도착하니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벌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늘에선 제 편인 독수리들이 쉴 새 없이 날아다녔고, 저쪽에서도 이름 모를 거대한 새들이 눈에 띕니다. 저마다 손에 무기를 들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 넓은 벌판에 사람이라고는 저뿐이었습니다. 아, 나는 빈손인데, 하는 생각이 들던 순간 마치 처음부터 손에 들려 있었던 것처럼 커다란 칼과 방패가 쥐어져 있습니다.
그때부터 서로 간의 살벌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죽어나가는 동물들, 끊임없는 공성전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저는 마법을 부리기까지 합니다. 성문이 거의 부서져갈 때쯤 손을 뻗어 뭐라고 중얼거리니 그 큰 성문이 종잇짝처럼 부서져 내립니다. 어느새 전 커다란 사자의 등에 올라타 끝도 없이 펼쳐진 나선형 계단을 뛰어올라갑니다. 감옥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파수병들을 가볍게 제압한 저는 드디어 공주와 만납니다. 달콤한 키스, 전쟁은 드디어 끝이 났습니다.
"왕자님! 저 **에요."
공주의 이름을 듣던 순간 까무러치게 놀라지만, 이내 공주를 데리고 나온 저는 다시 사자의 등에 올라탄 채 계단을 내려갑니다. 성 안에는 이미 와 있던 조금 전의 그 독수리가 있었습니다. 독수리를 타고 다시 하늘을 날아오릅니다. 제 등 뒤에는 방금 전에 구출한 공주가 있었고,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날아가는 동안 저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기차를 타고 오는 내내, 역에 내려 택시를 잡아타고 학교로 오는 동안에도 줄곧 꿈을 떠올렸습니다. 있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었지만 마치 실제로 체험한 것처럼 아직도 그 느낌이 생생합니다. 나니아 연대기와 반지의 제왕과 끝없는 이야기와 그리고 해리 포터의 이야기들을 마구 뒤범벅한 것 같은 한 편의 장대한 대서사시. 그 속에 제가 있었고 그녀가 있었습니다.
뭐, 학교에는 지각을 했지만, 간혹 이런 꿈을 꾸는 것도 정신 건강에는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