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작이 Jan 06. 2024

지하철 순례

이백 스물네 번째 글: 글쓰기 장소에 변화를......

종종 지하철 순례를 합니다. 말이 너무 거창한 것 같지만, 별 것은 없습니다. 제가 사는 대구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종점을 오고 가며 글을 쓰는 걸 이르는 말입니다.


저희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월촌역에서 안심역까지 25개소의 역을 가는 데 45분 정도가 걸립니다. 종점에 도착하면 인근을 잠시 산책합니다. 캔커피도 하나 마시고, 가끔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노래도 불러봅니다. 다음에 쓸 글의 글감을 구상하는가 하면 내리기 전까지 완결하지 못한 글은 이때 반드시 끝을 맺습니다. 그러고는 반대편으로 들어오는 열차를 타고 다시 종점인 설화명곡역까지 갑니다. 31개소의 역을 지나는 데 약 55분 정도 소요됩니다.


이 지하철 순례의 가장 큰 장점은 큰돈 들이지 않고 최소한 1시간 반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겠습니다. 게다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오롯이 저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끔 지하철 빌런을 마주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는 열차 칸을 넘어가면 되니까 큰 문제는 없습니다.


보통은 글감을 가진 상태에서 순례길에 오릅니다. 딱 타는 순간부터, 아니 열차가 들어오기 전부터 제 손가락은 바빠집니다. 그렇게 쓰면 적게는 두 편에서, 글이 잘 풀리는 날은 세 편 이상 쓸 때도 있습니다. 굳이 만만치 않은 돈을 들여가며 커피 전문 매장을 가지 않아도 되니 꽤 괜찮은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간혹 글감이 없는 상태에서 지하철에 오를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지하철 안의 풍경에 대해 쓰면 됩니다. 특히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에 대해서 쓰기도 하는데, 꽤나 흥미롭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외양이나 행동을 묘사하며 그 사람의 나이를 짐작하고, 성격은 물론 직업까지 유추해 봅니다. 이건 뭐, 사실상 소설 쓰기에 가깝습니다.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을 가 만들어 내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쳐다보거나 시선이 잘못 마주치면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게 참, 할 일도 어지간히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진 일이란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지하철 순례의 목적은 '시간 때우기'가 아니라 엄연히 '글쓰기'에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순례길을 마칠 때 완결된 글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건 가 말하는 지하철 순례를 한 게 아닙니다. 그럴 바에야 좌석에 기대어 부족한 잠이나 보충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말입니다.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매거진의 이전글 말랑한 고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