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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치고써 Jan 14. 2024

족욕의 시간

이백 서른일곱 번째 글: 나에게 몰입하는 시간!

20분 동안 족욕의 시간이 제게 주어졌습니다. 변기 덮개 위에 앉아 식초를 섞은 따뜻한 물에 두 발을 담그고 있으니 어딜 갈 수도,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식구들도 제가 족욕하는 걸 알고 있으니 부를 일도 없을 겁니다. 모처럼 만에 집 안에서 맞이하는 저만의 자유 시간입니다.


이럴 때엔 오롯이 제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됩니다. 하루 동안 뭘 그리 아등바등하며 시간을 보냈을까요? 마치 큰일이라도 치른 사람처럼 흐뭇한 미소를 띤 채 발을 담그고 있습니다. 하루 온종일을 싸돌아 다니느라 지쳤을 제 발에 휴식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뜻한 기운이 발바닥 전체를 감싸듭니다. 온몸을 휘감아 오는 그 느낌이 싫지 않습니다. 게다가 욕실에 퍼진 식초 향도 이제 더는 거슬리지 않습니다. 첫날에는 그렇게도 재채기가 나더니 이젠 녀석도 적응을 마친 모양입니다. 코끝이 약간 간질간질한 느낌도 싫지 않습니다. 발바닥 전체가 확 쪼그라 들었다가 일시에 펴지는 듯합니다. 조물조물한 손놀림, 마치 손길이 고운 누군가가 제 발을 지압하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듭니다.


눈만 감고 벽에 기대면 그대로 잠에 빠져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머리까지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족욕이 불면 치료와 두통 완화에 좋다고 하더니 아마도 이래서 그런 모양입니다. 이대로 발을 담갔다가 빼낸 후 깨끗이 씻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꿈길의 언저리까지 달려갈 기세입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봅니다. 뭐, 그다지 후회할 만한 일은 없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읽고 싶은 책도 몇 권 빌려 왔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격조했던 대학원 은사님께서 펴내신 신간을 빌려온 것만으로도 오늘 도서관에 갔다 온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게다가 글도 여덟 편이나 썼습니다. 휴일 하루 오늘처럼 이렇게 원 없이 글을 썼다면 달리 무엇을 더 바랄 게 있을까요?


얼른 마치고 나가 은사님의 신간을 펼쳐보고 싶습니다. 주역과 관련한 책이라 제겐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됩니다만, 그분의 사유의 세계에 발을 담가보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 무탈하게, 또 나름 잘 보낸 제 자신에게 잘했다며 칭찬해 주고 싶은 밤입니다.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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