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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치고써 Jan 26. 2024

기차 입석표

이백 쉰한 번째 글: 이럴 땐 아날로그로......

"뭐, 별로 할 일 없제?"

"내가 뭐 할 일이라도?"

할 일은 산더미지만, 감히 일 있어서 안 된다며 말머리를 자를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미 말을 들었다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아들)가 기차표가 없어가 설 연휴 때 못 내리올지도 모르겠다카네. 지금 동대구역 가가 입석표 있는지 알아바라. 있으면 바로 끊고."

중전마마님의 지엄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다 들어놓고 지금 가봤자 표가 없을 거라느니, 다른 방법은 없냐느니, 하고 있을 순 없습니다.


설령 표를 못 구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 보니 없더라'와 '가 보지도 않고 있니 마니'하는 건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마음 같아선 거수경례라도 붙여야 할 판이지만, 어물쩡거리고 있을 틈이 없습니다. 신속하게 채비를 차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SRT 기차에 입석표를 발권하기나 하는지, 만약 한다면 지정 좌석의 몇% 선에서 입석표를 발권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복불복입니다. 가 보고 있으면 구하는 거고, 없으면 또 다른 수를 알아봐야 합니다.


그런 게 아빠와 엄마의 차이인지, 아니면 특별히 제가 더 무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상황에서도 뭐 어떻게든 오겠지, 하는 스타일이고, 집사람은 어떤 수를 써서든 기차표를 구해야 하는 유형입니다. 어마어마한 인맥을 동원하여 유사시에 표를 구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도 벌써 확보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가능하다면 그 선까지 손을 뻗치고 싶진 않다는 것이지요. 아마 내보내면서도 제가 표를 구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을 겁니다.


22년 넘게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깨달은 게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아내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와 아내가 의견이 상충될 때 거의 대부분은 아내의 생각이 옳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 다물고 동대구역으로 갑니다. 과연 표가 있을까요?


< 후기 >
역시 마누라의 말은 항상 옳다는 게 또 한 번 증명되었습니다. 표 두 장 다 발권하고 늠름하게 돌아갑니다. ^^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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