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둥치가 꽃을 품다
산책을 하다 속이 텅 빈 나무둥치 하나가 눈에 띄어 끌고 왔다. 어디든 쓸모가 있을 거 같아 낑낑대며 가지고 온 것이다. 오늘은 이 나무를 화단 경계로 쓰기로 한다. 수평을 맞추고 양 옆구리에 돌을 끼어 넣는다. 채운 흙이 빠져나가지 않게 하는 가림벽으로 돌은 그런대로 제격이다. 이곳에서는 필요하다고 해서 금방 나가서 물건을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주변에 있는 것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불편함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선택하지 않고 궁리할 수 있다는 점이 덜 소모적이다.
이른 봄이어서 아직 꽃집에 봄꽃 모종이 별로 없다. 나무둥치가 깊지 않으니 낮은 꽃이 어울리겠지.
어떤 꽃이 좋을까 고민하다 작년에 화분에 심어 집 안에서 키우다 실패한 운간초가 생각나 인터넷 구입을 해두었다. 운간초는 바위취과 여러해살이 풀로 고산지대에서 영하 30초까지 견디는 강인한 야생화다. 고산지대 하늘 위에서 핀다고 해서 '천상화'라고도 하고 구름 사이에 피는 꽃이라고 해서 ' 운간초'라고도 한다. 대신 과습에 약해서 여름철 장마기간을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작년에 꽃을 죽인 이유를 이제 알았다.
여섯 포트 구입한 한 것 중 세 포트는 나무둥치 화분에 심고 나머지 세 포트는 안쪽 화단 경계에 심는다.
이름표까지 써서 꽂아 주고 나니 점심 나절이 지난다.
물 한번 듬뿍 주고 봄 햇살과 함께 꽃을 들여다본다. 허물어져 가는 나무 둥치가 꽃을 품고 있는 풍경,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삶을 다하고도 쓸모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살아가는 일도 그랬으면 좋겠다. 살아온 어떤 흔적이 누군가에게 따스함으로 스밀 수 있다면 우리가 생각하던 '끝'은 새로운 것의 '시작'이 될 것이다
봄, 한나절 잘 놀았습니다
하주자
산책을 하다
나무둥치 하나 만났습니다
살아 온 흔적을 버리고
텅 비어 있는 등걸
머물다 지나간 계절을
곰곰 헤아리다
둥치를 끌고 내려왔습니다
따라 온 봄볕
납작한 돌에 앉히고
양 쪽 귀로 넣어둔 소라껍데기
바람이 스며서 숨이 되었는지
어느 봄 날
꽃몽울 품고 푸르러져
구름과 구름 사이 핀다는 천상의 꽃들과
희고 붉은 한나절 잘 놀았습니다
《사막여우와 의자》 中 시와사람 ,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