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 시인의 <그 말이 나를 살게 게 하고>
그 말이 나를 살게 하고
천양희
접어둔 마음을
책장처럼 펼친다
머리끝에는 못다 읽은
책 한 권이 매달리고
마음은 또
짧은 문장밖에 쓰지 못하네
이렇게 몸이 끌고 가는 시간 뒤로
느슨한 산문인 채
밤이 가고 있네
다음 날은
아직 일러 오지 않은 때
내 속 어딘가에
소리 없이 활 짝 핀 열꽃 같은
말들, 언로(言路)들
오! 육체는 슬퍼라. 나는 지상의 모든 책들을 다 읽었노라던 말라르메의 그 말이,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던 김수영의 그 말이, 흠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던 랭보의 그 말이, 누가 나를 인간에 포함시켰소라던 브로드스키의 그 말이, 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떻게 알겠냐던 니체의 그 말이, 바람이 분다. 살아보야겠다던 발레리의 그 말이......
나는 본다
나에게로 세상에게로
내려앉은 말의 꽃이파리들
내 귀는 듣는다
나에게로 세상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말의 발자국 소리들
나를 끌고 가는
밑줄 친 문장들
《마음의 수수밭》 창작과 비평사. 2019.
봄비가 촉촉하게 내린다. 기다리던 반가운 봄비다. 빗방울 맺힌 창 밖은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사라져 있다. 나무들의 물 번짐이 수묵화 한 폭 같다. 비가 내리니 하루가 헐렁해진다. 수도를 파느라 헤집어 놓은 밭의 돌을 골라야 하는데 다음 주로 미뤄야 한다. 음악을 틀고 커피 한 잔을 내려 다락으로 올라와 시 한 편을 필사한다.
' 접어둔 마음을 책장처럼 펼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정작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일상. '느슨한 산문'조차도 되지 못하고 떠밀리는 생활. 번아웃 되기 직전에 만든 이 공간에서,
시인을 살게 했던 말이 오늘은 나를 살게 하는 시 한편으로 다가온다.
나를 끌고 가는 詩 한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