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은 물 속에서 더 환한데> 문학동네
오월, 작약밭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봉오리가 올라오기를.
맺힌 봉오리가 꽃잎을 열어주기를 ...
새벽 이슬을 밟으며 또 저녁 어스름 속을 걸으며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작은 구근을 심은지 4년째다. 첫 해부터 꽃을 볼수 있다고 했지만 산중 자갈밭에 심은 구근은 몸살을 앓았는지 명줄 유지 하는것도 힘들었다.
핀듯 시들거나 아예 죽거나 해서 밭이 텅 비었다.
그 다음해에는 잎이 짱짱하게 나와서 제대로 꽃은 피었지만 구근이 죽은 곳은 이 빠진 자리가 되었다.
작년부터는 제법 튼실하게 잘 자라 무더기 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씨앗 발아가 되는지 애기 작약 순들이 여기저기서 올라와 밭을 점점 채워갔다.
가을에 큰 작약들을 파서 구근을 나누어
빈 자리마다 심었더니 올 해는 제법 꽉찬 꽃밭이 되어간다. 꽃밭이 보이는 창가 식탁에 앉아 시를 옮겨 적는다.
읽을때마다 마음 울컥해지는 시집 《작약꽃은 물속에서 더 환환데》 이승희 시인의 세번째 시집 중 작약꽃이 나오는 <헤어진 후>와 <작약은 물 속에서 더 환한데>를 옮겨 적는다.
밤마다 물 속으로 들어가는 집, 물 속에 있는 집,
슬픔에 잠긴 집, 겹겹이 작약이 피었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 적막, 오는 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텐데도 오지 않는 사람!
어느날 혼자 작약꽃을 들여다보다 눈물 속 꽃빛을 보았을 화자. 그 눈물의 길을 따라가며 절망을 비춰보며 환하다고 말하는 슬픈 한 사람
누구에게나 이런 이별이 마음에 한 덩어리로 남아 있지 않겠나
작약꽃들을 바라보다가 눈시울이 잠깐 뜨겁다.
헤어진 후
이승희
밤이 되면 집은 불을 밝혀 물속으로 돌아간다
비로소 물속에도 꽃이 피고
나는 바깥을 견디지 않아도 좋았고
슬픔은 슬픔을 견디지 않아도 좋았고
세탁소 골목을 지나가는 몇몇 물고기들이
좋은 사람처럼 보여서 좋았다
절망의 아름다운 밤이
편의점 불빛 아래에서
천천히 흩어질 때
공원을 걷는 사람들
키 큰 나무들 가지와 가지 사이에
적당한 높이로 앉아 있다
똑똑 가지를 꺾어
없는 두 손을 만들고
없는 두 손을 오래 흔들고 있었다
물은 흐르지 않았고
나는 없는 두 손을 가지고 싶었다
마당에는 작약이 피었다
겹겹이 작약작약
작약이 이렇게나 피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잘 찾아올 수 있을 것인데
물은 고요하고
대문 앞 가로등이
작약의 낯을 보고 있다
오래 만지고 있다
물속을 날아가는 나비 한 마리 같았다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이승희
작약 속을 걸었다
작약이 없다
작약이 아닌 것든만 가득했다
죽는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거기와 이곳의 사이는 없고
환상이라고 말하면 이미 환상이 아닌데
여기는 한 번쯤 죽어야 올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물고기가 바라보는 곳을
새 한 마리가 바라본다
나도 그곳을 바라본다
모두 다른 곳인데 한곳에 있었다
작약은 거기 있다
허공에 뿌리를 두고
꽃을 물속에 두었다
누가 밀어넣었을까
누가 밀어올렸을까
어떤 반성과 참회가 꼭대기를 흔들었다
무수하게 산란하는 물고기들이
내 얼굴을 스쳐간다
작약 속을 걸었다
작약이 없다
이 모든 게 작약이 되는 날이 온다는 말을 이제 믿지 않는다
치욕스러웠고
슬펐다
반복되는 작약
피가 물속으로 퍼져갈 때 작약꽃이 피었다
나는 집을 만들 손이 없었다
이승희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중 문학동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