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된 풍경-<고요히 봄을>

고요히 봄을

by 자야

♡ 안개멍

이른 아침 새소리에 잠이 깬다. 반쯤 감기는 눈을 비비며 창을 내다본다. 안개가 숲에 가득하다. 밤새 내린 봄비가 차밭 위로 촉촉하게 스며들어 있다. 멧비둘기 몇 마리가 작약밭에 잠시 앉았다 날아간다. 낮게 나는 날갯짓이 안개에 묻힌다.

숲은 바다빛인지, 물빛인지, 하늘빛인지 모르게 섞여 흐른다. 고요한 은빛 물결이다.


내 안에 가득한 강박들이 순간 멈춘다. 매 순간 해야 하는 판단, 내 취향과는 상관없이 소화해야 하는 이질적인 관계들, 집단과 집단의 이해관계, 그 속에서 사람들의 미묘한 화술에 말려들지 않는 것, 상대방의 카드를 가늠하는 긴장의 끈, 이 모든 것 숲에 들어와 멈춘다.

비로소 여는 마음의 빗장.


물오름을 시작한 나무들의 살결이 싱그럽다. 작약밭 풀더미 속에 꽃순들은 지금쯤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면서 하염없이 바라보는 안개멍. 멍 때리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풀멍, 물멍, 불멍도 좋지만 이렇게 이른 아침 잠결에 바라보는 안개멍은 편안한 몽환적인 아름다움까지 더해진다. 늘부터는 4대 멍으로 안개멍을 추가해야겠다.


고요히 봄을

하주자


밤새 비가 내린 숲

멧비둘기 깃 사이로

느리게 흩어지는 흰 물결


숲은 나무였다가

꽃이었다가

물이었다가

하늘이다


새벽 잠결에 엿본


숲의 몽환


《나비, 꿈속에 들다》 中 시와 사람 2024.




♡ 불멍

산책하다가 주인장이 가지치기 해놓은 나무 몇 가지를 끌고 와 저녁에 불을 지핀다. 저녁 찬 바람에 코끝은 차갑지만

불을 쬐는 손은 따뜻하다. 고구마도 몇 개 호일에 싸서 장작 밑에 넣는다. 타닥타닥 나무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고구마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도 같이 올라온다.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장석주

땅거미 내릴 무렵 광대한 저수지 건너편 외딴

함석지붕 집

굴뚝에서 빠져나온 연기가

흩어진다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오, 저것이야!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느림!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하게》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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