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렛 생스터는 ‘하지 않은 죄’란 시를 지어 수많은 이를 감동시키고 또 각성시켰다. 그러나 내 남편은 ‘짓지 않은 죄’로 인하여 30여 년간 아내에게 시달림 아닌 시달림을 받아왔다. 노년을 눈앞에 두고 이제 문득 남편의 죄를 사하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아내는 기억 갈피갈피를 뒤적이며 그것이 죄가 아니었음을, 아니 설혹 죄였더라도 이제 사해 주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찾아내고자 하게 된다.
첫 번째 죄는 남편이 청혼도 하지 않고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연유는 이렇다. 우리는 우리의 연애가 여러 조건에서 양가의 환영을 받으리라는 기대를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양가 부모님의 승낙이라는 장벽을 조금이라도 순조롭게 돌파하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러운 상황을 만들어 부모님 한 분 한 분을 전략적으로 각개격파하기로 했다. 아버님(시아버님)이 집에 안 계시는 틈을 타서 살짝 어머님께 먼저 인사를 드렸고, 미리 우리 편으로 끌어들인 내 동생들을 다 동원해 자연스러운 상황을 만들어 우리 엄마와 아빠께 각각 인사를 드렸다.
마지막으로 아버님이라는 관문만 남았을 때, 아버님께서 먼저 00 씨를 통해 만나자는 연락을 해오셨다. 맛있는 저녁을 사주겠다고 하셨다. 00 씨가 너무 자신 있게 괜찮다고 해서 그냥 화장기 없는 얼굴에 평상시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그 모습 그대로 면바지와 티셔츠, 랜드로바 운동화 차림으로 나갔다. 어머님의 가볍게 ‘쯧’하시던 표정, 그리고 가까이 사시던 셋째 숙부님 식구들까지 다 나와 있는 상황에 좀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아버님께서 00 씨를 통해 우리 부모님을 한번 뵙고 싶다는 전갈을 해오셨다. ‘나이 다 찬 딸이 남자 친구가 있다고 하면 부모님께서 걱정이 크실 테니 한번 만나 뵙고 인사나 드리고자 한다’고 하셨다. 양가 부모님이 처음 만나셨을 때 아버님의 이야기 주제는 ‘그저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였다. 당시 00 씨 집안의 경제 형편은 우리 집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어떻게 아버님이 우리 둘의 공부와 결혼 생활을 다 책임지신단 말인가?
지금 생각해도 참 이상한 일은, 세상 까다롭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실 우리 아빠, 없는 걱정도 만들어 내시는 우리 아빠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버님께 넘어가고 있었다. 아버님의 허세에 솔깃하셨던 걸까? 아니면 두 분이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강한 믿음과 호감을 느끼게 되셨던 걸까? 어쩌면 현실적으로 결혼할 조건이 되지 않는 아들과 딸을 결혼시키기 위한 브로맨스가 작동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공교롭게 병석에 계시던 아버님께선 문상도 못하시고 자기 가슴에 큰 별이 졌다고 통곡을 하셨다고 한다. 사실 두 분이 만나 담소라도 나눈 횟수라야 기껏 서너 번 정도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아무튼 강남의 화려한 가든 식 갈비 집에서 저녁을 대접받았으니 아빠도 그냥 넘길 수 없다 하시며 답례로 평창동 중국집에서 점심 초대를 하셨다. 그리고 정신 차려 보니 한 달도 안 되어 양가 엄마들끼리 만나 결혼식 날짜를 잡고 있었다. 우리는 둘 다 그때까지 결혼하겠다는 의사조차 밝힌 적이 없었다.
나는 00 씨와 결혼을 하려면 아빠와 의절을 하든지 아니면 짐 싸들고 가출을 하든지 그런 결단과 고난의 순간을 견뎌야 할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던 터라, 전혀 예상치 못한 순조로운 상황 전개에 얼떨떨하게 무장해제 되어 결혼식장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결혼 후 2~3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에야 내가 정작 00 씨로부터는 정식 청혼도 받지 않은 채 결혼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드라마가 화근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결혼 생활에 대한 온갖 다짐과 각오를 하고 또 하고, 경건하기 그지없는 떨리는 표정으로 반지를 내밀며 청혼하는 남자가 너무 아름다웠다. ‘어~? 나는 어땠지?’라고 기억을 떠올리려는 순간, 세상에나 난 남편으로부터 청혼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때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냥 막내며느리 감으로 아버님 눈에 들어 달랑 업혀 들어간 것이지, 00 씨는 나와 결혼하기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쪽 무릎은 꿇지 않아도, 예쁜 반지를 내밀지는 않아도, 그래도 ‘나랑 결혼해 줄래?’라는 진지한 한 마디 정도는 있어야 했던 것 아닌가? 00 씨도 자신이 청혼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제야 놀란 듯,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 이후로 남편의 서툰 결혼 생활이 내 심사를 사납게 하거나, 드라마나 영화에서 너무 멋있게 청혼하는 남자가 나오기만 하면 남편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째려보며) 어떻게 청혼도 안 할 수가 있었을까? 결혼 생활을 어떻게 하겠다는 결심이나 각오는 했던 거야?’ 이런 나의 비난에 첫 몇 년은 반역죄라도 지은 죄인 같은 표정으로 묵묵부답이던 남편이 세월의 더께가 쌓이면서 입을 떼어 대답하기 시작했다. ‘나도 각오는 했지’, ‘무슨 각오? 어떻게?’, ‘잘 살아야지 했지’, ‘어떻게 하는 게 잘 사는 건데?’, ‘몰라, 나는 그냥 무조건 잘 살아야지 했어’, ‘그게 뭐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게 잘 사는 건데?’, ‘그냥 무조건 자~알 살아야지 했다고’, ‘에휴… 할 말이 없네’, 그렇게 싱겁게 대화가 끝나곤 했고 나는 어떻게 해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도 남편은 ‘당신은 왜 청혼을 하지 않았어? 꼭 남자만 청혼해야 한다는 법이 있나?’ 이런 치사한 반격은 하지 않았다. 나도 꼭 남자가 청혼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에 만약 남편이 그런 반격을 해왔다면 대꾸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또 억울하고 분해서 다른 꼬투리를 잡아 뾰로통해졌을지도 모른다.
결혼 37주년을 앞둔 어느 날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당신은 그녀를 위해서 뭘 준비했습니까? 당신 자신 말고’라는 남자 주인공의 대사였던 것 같다. 심심하던 차에 남편을 골려줄 속셈으로, ‘(남편을 빤히 바라보여 드라마 대사의 톤을 모방해) 당신은 날 위해 뭘 준비했을까? 당신 자신 말고?’라고 던져 보았다. 남편의 답변은 결혼 생활 내내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그 유들유들함이 입신의 경지에 오르고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 나는 오로지 당신 말을 자알 듣는 남편이 되어야지 했지’. ‘(피식 웃으며) 참내, 뭐래. 기가 막혀서. 할 말이 없네.’ 남편은 이렇게 가볍게 지뢰를 피해 가고 있었다.
결혼 생활 내내 큰 소리 내는 말다툼 한 번 하지 않고 잘 살았는데 결혼 전 청혼을 했느니 안 했느니 남편을 괴롭히는 것도 멋쩍어진 어느 날, 아무래도 그 죄를 사해주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냥은 아니고, 어떻게 해서든 그 죄를 사해줄 핑곗거리는 찾고 싶었다. 그러다 기억의 갈피에서 찾아낸, 까맣게 잊고 있었던 혈서 한 장. 오래된 내 일기장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결혼식을 열흘 정도 앞두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고 기억한다. 나는 이런저런 결혼 준비를 하면서 점점 깊은 우울감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당시의 시간을 나는 ‘성장을 멈춰버린 시간, 스스로에게 면목이 없는 시간, 사랑·결혼·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방랑자 같은 심정’ 등으로 일기에 묘사해놓고 있다. 누구한테 쉽사리 속내를 털어놓는 성격도 못되어 혼자서 하루 종일 짙은 먹구름 속에서 허우적거렸고, 누구라도 툭 치고 지나가면 바로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외로움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날은 남편에게 줄 결혼 예물인 시계와 반지를 찾는 날이었다. 남편은 반지를 꺼내 미리 손가락에 끼고는 즐거워했으며, 우리는 명동극장에서 ‘더티 댄싱’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신나는 음악과 댄스에도 나는 점점 더 우울해져 갔고, 결국 눈물이 내 온몸을 꽉 채웠다.
헤어지기 전 우리 집 앞 시끌벅적한 생맥주 집에 앉아 결국 나는 눈물을 터뜨렸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00 씨는 어쩐 일인지 달래줄 생각도 하지 않아 나는 그렇게 한참을 혼자 울었다. 한바탕 눈물을 쏟고 나니 그래도 좀 가벼워진 내가 소리 없이 눈물을 수습할 무렵 뭔가 한동안 부스럭거리던 00 씨가 내 앞으로 흰 종이 한 장과 다시 케이스에 잘 넣은 결혼반지를 내밀었다.
세상에나, 내가 제 설움에 겨워 울고 있던 그 순간에 00 씨는 손가락을 물어뜯어 혈서를 쓰고 있었다. 내가 결혼이 하기 싫어 운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내 우울과 눈물을 감당하기 어려워서였는지, ‘사랑’이라고 큼직하게 쓴 두 글자와 결혼반지를 돌려주고 있었다. 피로 맹세하는 사랑이란 의미인가? 아니면 그만큼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혼반지를 돌려주겠다는 의미인가? 아니, 무슨 항일독립투사도 아니면서 혈서를 썼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혈서를 쓰려면 단지斷指를 해서 시나 문장이라도 쓰던지 손가락 물어뜯어 겨우 두 글자라니. 손가락 물어뜯은 자리가 아프지 않을까 걱정은 두 번째고, 나는 어이가 없어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그렇게 결혼 전 나의 슬럼프는 사라져 갔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옛 일기장 속에 고이 접혀 있는 혈서를 꺼내 본다. 이젠 거무튀튀하게 변해버린 큼직한 두 글자가 곱게 말려진 장미 같기도 하다. 결혼할 결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결혼식장으로 걸어 들어간 철부지 우리의 결혼 생활을 지켜준, 백만 송이 장미만큼 귀한 두 송이 장미였다.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며 청혼하기 위해 고민하지 않았으면 어떠랴. 또 무릎 꿇고 경건하게 반지를 내밀지 않았으면 어떠랴. 남편은 혈서로 평생을 사랑하겠노라 맹세했는걸. 청혼을 하지 않은 죄는 짓지도 않은 죄, 여보 이제 사하여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