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에피소드 2
세상의 큰 목소리가 무용할 때, 생각해보아야 할 것
<큰 목소리, 하나>
일단 돈을 벌겠다고 선택한 사람들, 부자가 되고 난 이후로 자신들의 진짜 계획을 미뤄둔 사람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누리기만을 원하는 사람들, 삶이란 최대한의 자유로서 행복의 추구와 욕망, 본능의 절대적 충족, 세상의 무한한 부를 당장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제롬과 실비는 이런 종류의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이런 이들은 늘 불행하다. 사실 이런 딜레마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가령 너무 가난해서 조금 더 잘 먹고, 조금 나은 집에 살면서 조금 적게 일하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거나, 혹은 처음부터 아주 부자여서 이런 괴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 같은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사회는 사람들이 점점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게 되어가고 있다. 누구나 부를 꿈 꾸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여기서 불행이 시작된다.
조르주 페렉 『사물들』
우리나라 중산층의 현실이니, 중위소득이니 하는 키워드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끌려들어 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인다. 경제관념이라고는 성실히 일하고 여건에 맞는 만족을 추구하자가 전부에 가까운 내게도 꽂히는 단어는 어쩔 수 없이 '중간', '평균'인 것이다. 그 중간과 평균이라는 것도 때로는 유지해 나가기에 숨이 막히고, 고위소득자들의 삶에 대한 아득한 수치들은 더하다. 이러거니 저러거니 해서 젊은 사람들은 소득을 올리고 자산을 모으고, 골치 아픈 그런 내용을 전달하는 목소리마저 듣기 싫다고 짜증을 끼얹으면서도 필시 '나도 모르는 무언가'를 막연히 궁금해한다. 다른 사람들이 사는 만큼의, 딱 그만큼의, 삶에서도 멀어져 버릴까 불안을 가득 안고서. 마치 그들의 말처럼 무언가를 놓치고 잃고 현명하지 못하게 굴다가 남은 내 삶이 그들이 말하는 불편하고 고단한 괴로움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 요즘 세상은 묘하게 부를 이루지 못하면 어떤 실패를 겪게 될지 모른다고 상냥하고 우호적으로 말해준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태어남과 동시에 신분이 정해져 자신의 삶의 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귀족 사회가 저물고 민주주의가 도래하자, 모든 구성원들이 물질적 평등을 성취할 수단이 없음에도 이론적으로는 평등하다고 느끼게 되었다고. 아, 지극히도 평범하게 태어난 나는 '우리들의 뒤틀린 욕망'의 출발점이 여기 있었구나라고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어찌 됐든 모두가 원하면 어쩌란 말일까? 물질적인 부를 성취할 수 있는 실질적인 그 무엇도 가지지 못한 이가 계속된 기대와 확신을 품고 자신의 삶도 다른이(부를 지닌 소수의 이들)의 그것과 같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곤혹스럽다. 그 곤혹스러움을 모두가 함께 욕망한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다.
제롬과 실비는?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해내지 못했다.
"그들은 탈출을 시도했다.
광기에 사로잡혀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토록 많은 것을 약속하면서 실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 이 세계에서의 긴장은 너무 심했다. 그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어느 날 자신들에게 피난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큰 목소리, 둘>
어떤 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사람, 어떤 전문가가 있다고 해보죠. 이 사람은 해고되는 순간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어요. 그러니 노숙자가 되는 거예요. 옛날 농경사회에는 노숙자가 나온다는 건 불가능했죠. 모든 일을 두루두루 잘했으니까요. 대도시 생활에서 노숙자가 나온단 말이에요.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효율적인 착취를 위해 우리를 유혹해요. 인간적 불구, 즉 전문가가 되면 더 부유해진다고요.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체제의 작은 부품이 되려고 해요.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고, 전공을 선택하고, 학위를 받는 거잖아요. 분업의 논리는 굉장히 위험한 논리예요. 이것을 어떻게 없앨까, 하는 것도 우리가 고민해 봐야 돼요.
그렇지만 잊지 마세요. 전문가만 되면 삶이 부유해지고 안전하리라는 느낌은 착각이라는 사실을. 오히려 사정은 반대라는 것을요.
강신주·지승호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은 돈과 직결된다. 더 큰돈을 벌기 위한 수단은 더 안전하고 좋은 노동력을 가지는 일이고, 현대에 좋은 노동력은 '전문가'로 대변되기도 한다. 자연히 많은 이들의 삶의 지향점이 그곳을 향한다. 우리는 모두 다른데, 모두 비슷한 곳을 향한다는 게 가장 큰 난점이 아닐까.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 노동과 자본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노동의 주체는 자신의 분야 혹은 일에 아무리 오랜 세월 헌신한다 해도, 그 지위는 자신의 성과와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경제적 성공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자신은 성공과 이윤을 위한 수단이 될 뿐, 노동자의 지위는 평생 보장될 수 없고 지속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진실. 자신을 자신의 노동으로 얻어지는 허울인 사회적 지위와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언젠가 그 지위는 사라질 것이고, '자신'은 남게 된다.
철학자 강신주는 우리가 성공의 지름길로 여기는 전문가가 되는 것이 어떤 시선에서 위험하다 했을까? 그들은 오로지 자신을 전문화하기 위해 인간적인 삶을 포기했을지 모른다. 여러 경험과 삶의 요소가 통합된 하나의 사람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 성공 아래로.
"톨스토이를 읽거나 여행을 다닌 적이 없고, 친구하고 갈등한 적도 없고, 그것을 해결한 경험도 없고, 내가 도움을 준 어떤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바위에 앉아서 구름을 바라보거나 시냇가에 발 담그고 간지러움을 느껴본 적도 없이 올인을 했어요."
인간의 삶에 유일한 확신성이라 믿는 부를 갈망하는 것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교환되는 노동력과 그로 대변되는 사회적 지위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것도, 우리에게 진정한 삶을 약속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큰 목소리들―소리가 크다고 옳은 것은 결코 아니다―이 무용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삶을 취할 수 있을까. 모두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은, 글쎄, 개개인이 자신 만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와 사회적 지위를 위한 수단으로써만 자신을 다듬어가지 말고, 통합적인 한 인간의 길을 갈고닦으며 사는 것.
"남들이 만들어 놓은 패턴이 이 세상에서 우세하기에 잘못된 신을 따라 집으로 왔더니 우리의 별을 놓쳐 버렸네."
클레어 데더러의 『POSER』에 나오는 문장으로, 윌리엄 스태포드의 시 구절이라 했다. 이 문장을 나는 책의 다른 내용들과 구별되는 인덱스로 표시했었다. 그와 함께 눌러쓴 메모가 남겨져 있다.
길을 잃고 싶지 않아 겁을 내니, 내가 자꾸만 사라진다.
겨우겨우 발 더듬을 하며 걸어가고 있는데
단장되고 구획된 길이 아니라 헉헉 두리번거리기에 바쁘고.
자신을 지키고 싶어, 나는 늘 열을 내게 되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나 스스로에게
왜 내가 나를, 그들을, 이해시켜야만 하지!
그러다 한없이 흔들린다.
가로등은 드문드문 있고요,
작은 돌부리에 차이고요,
주변에 걸어가는 이가 잘 보이지 않네요.
두려움 만이 내 곁에 있어요.
이 비밀스러운 메모는 내 안에서 읽어낼 수 있다. 수년 전.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따위에 대해 지치도록 고민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뭐 하고 살고 싶은데?" 지금도 그때의 통증이 생생하다.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누구나를 쉽게 설득할 수 있도록 강요받아 본 적 있는가. 꿈을 이야기하며 살아가고 싶은 삶을 풀어놓을 때, 상대방의 미묘하고도 난감한 표정을 마주해 본 적은 있는가. 이상적으로 원하는 바를 마음에 품었으면 놓을 줄 모르는, 동시에 뚜렷한 해답도 내놓지 못하는 별난 사람이 나였다. 모두들 이제 그만 안정적인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 거 아닌지 궁금해했다. 나는 원하는 바를 그냥 따라가 보면 안 되는 건지 궁금해했다. 반복되는 설전.
제법 시간이 흘렀으니, 그때의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내가 선택하고 걸어가는 길의 바람과 온기, 길 옆의 푸른 들풀과 잎이 앙증맞은 이름 모를 꽃, 간혹 손을 마주 잡고 웃음을 나누는 이, 이 모든 것은 나만의 경험이라는 것. 그저 내가 알게 된 것은 그것뿐이다. 내가 가는 길이라면, 나의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그대의 바람과 같지 않다는 것. 그것만 알면 우리는 괜찮지 않나. 모든 생의 감각은 내 안에 있다. 아! 그리고 두려움 만이 곁에 있는 줄 알았던 그때에 '나의 별'이 작은 빛을 계속해 비추었음을 이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