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족이었을 때……
"어린 형의 사진들을 보면 뭉클한데, 우리는 같은 피부색과 눈과 머리칼을 갖고 있지만 그 비슷한 겉모습 아래에는 결코 접촉한 적이 없는 마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두아르 르베 『자화상』
모두, 가족은 안녕하세요?
나는 지나치게 가족을 이상화하는 관념들에 불편감을 느낀다. 이 문제를 정작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은 결혼 후의 일이다. 스스로가 나의 가족이라는 단위를 구성하기 이전에는 태어나보니 자연스럽게 주어져 있던 최초의 환경이 바로 가족이라는 형태의 관계였던 것이다. 분명 '가족'이라는 집단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 낯설 수밖에 없는 시간들이었다. 어른이 되어 나의 '가족을 만들어야 한다'는 시기에 진입하고, 후로 예상치 못했던 무수한 경험들을 하게 되면서 가족에 대해 다시금 바라보게 되었다. 사회에서 그토록 의미를 부여하는 '가족'이란 무엇이지? 내가 보고 있는 이 사람들과 나는 가족이라는 질긴 끈으로 묶여 있는데, 도대체 영역 설정이 어떻게 되는 거지……? 이 관계를 긍정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부담을 깨달아가는 건 나뿐인가? 새로 맺어진 가족 관계뿐 아니라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온 원가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질문이 늘어났다. 부모 형제로부터 나를 개별적 존재로 명확하게 분리해 인식하기 시작한 청년기 이후로 다른 삶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내는 다른 사람들인데, 일반적인 사회적 관계와는 차별화된 끈끈하고 단단한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요구받는 느낌이었다. 일명 여러 사람 몫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정도의 느낌이다. 물론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물리적으로 오래 맺어온 인연들에 대해 친밀감의 밀도가 더 높고, 그들을 좋아하고 걱정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할 것이다―사실, 이마저도 억지스럽게 강요되었을 뿐인 끔찍한 가족 관계가 주변에 무수히 존재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감정과 연결성을 넘어서서 유일하고 단일한 결속처럼 이상화시키고 가족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관념들이 답답하게 다가왔다. 비슷한 모습을 하고 만나면 서로의 닮은 점들을 무의식적으로 짚어보는 가족 구성원들의 깊은 속에도 '결코 접촉한 적이 없는 마음들'이 가득하다. 그들은 결코 하나일 수 없고 그렇게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들 모두가 우리는 하나라고 느끼는 것보다, 가족은 하나라는 외부에서의 억압적 시선이 더 강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거창한 연극 무대에 오른 것처럼 '가족의 삶'을 펼쳐나간다.
핵가족의 경우라면 가족이 물리적으로 '하나'인 시기는 대단히 짧습니다. 부모와 아이 둘인 4인 가족이라도 넷이서 한집에서 같이 사는 건 고작해야 20년 정도입니다. 형제간의 나이차가 크면 넷이 함께 지내는 기간은 10년 미만인 경우도 있지요. 그 후로는 두 번 다시 함께 사는 일 없이 가끔 친척 장례식 때나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족이란 정말로 잠정적인 제도입니다. 이를 두고 '하나인 가족'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을 저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정말 사이좋고 서로 존중하는 가족 관계라면 서로 지나치게 간섭하는 일 없이 필요할 때만 서로 돕는 긍정적인 관계일 겁니다. 이러한 가족의 구성원들에게는 자신들의 가족 관계를 표현할 때 '하나' '유대감' '일체감' 같은 표현은 불순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저는 가족 간의 친밀함을 과시하기 위한 행사를 수시로 여는 가족의 구성원이기보다는 평소에 "네가 원하는 대로 살거라" 하고 남 보듯 하면서 본가에 놀러 갔을 때는 "잘 왔구나"라며 웃는 얼굴로 환대해 주는 '거리감 있는 가족'의 구성원이고 싶습니다.
우치다 타츠루 『곤란한 결혼』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근대적 모습의 핵가족제도가 자리 잡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경제적, 정서적 기능을 위임받아 책임지고 수행하는 가족 제도는 시대가 변해가며 강화되는 개인주의와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불편한 관념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내 것, 나의 권리, 개인의 성취, 자신의 자유와 행복에 대한 인식이 뚜렷해지면서 그 자신의 틀이 되는 가족 또한 그 안으로 끌려들어 왔다. 점점 가족은 이상화되기 시작했다. 화목하고 즐겁고 사랑과 믿음과 공감이 넘실대며 서로를 언제까지나 끝없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지지하며 많은 사회적 가치를 함께 이루고 누린다. 우리는 가족이기에 이 모든 것을 함께 누릴 수 있다. 글쎄, 그렇지가 않다니까.
유튜브와 각종 SNS계정에 누구나 콘텐츠를 올리고 모두가 콘텐츠를 감상하는 흐름이 일상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여러 가족의 모습을 보게 된다. 언제쯤부터 유행하는 것 같은 '임밍아웃'이라는 콘텐츠를 보며, 나는 고개를 한껏 갸웃거렸다. 자녀가 결혼 후 아이를 가졌을 때 부모들이 행복해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영상 속의 모습은 놀라웠다. 초음파 사진을 받아 들 때, 격앙되게 놀라며 울음을 왕 터뜨리고 온갖 미사여구를 들여 축하하는 그런 과정말이다. 누군가의 사적인 경험으로 괘념치 않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지나친 슬픔과 행복은 소화가 더딘 것처럼 더부룩했다―의도적으로 기획 하에 찍힌 영상이라 그렇게 생각되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시대는 가족을 드러내는 많은 방식이 과잉……아닐까. 지나친 연결감이 기질적으로 맞지 않거나 감정 표현이 절제된 성향이라거나 애초에 자족적으로 독립심이 강한 이들은 지레 겁먹는다. 넘쳐나는 가족에 대한 표현들이 강한 결속력에 맞추어 이상화되어 갈수록 이물감이 든다는 말이다. 가족에 대한 이상화가 집단적으로 실현될수록, 반대편에서는 곪을 대로 곪은 가족이라는 제도의 어려움을 실토하는 현상 또한 극명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 살 때 우리는 온전한 가족이었다. 지금처럼 다들 결혼해 자기 가족이 생겼는데, 자기만 가족을 만들지 못했다는 소외감도, 모두가 떠난 집에 혼자 남아 있다는 황폐한 외로움도 그때는 없었다.
그래서 큰누나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울었었나?
나이 차이가 많이 나 큰누나랑은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는데, 결혼하지 말라고, 누나 결혼하는 거 싫다고 김현기는 소리치며 떼썼다.
엄마는 그런 현기를 달래며 누나가 떠나는 게 아니라 가족이 더 늘어나는 거라고 했다. 그 말대로 계속 가족이 늘어났다. 매형과 조카들, 형수와 조카들. 그런데 가족이 더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왜 더 외로웠을까.
자신은 그대로인데 누나와 형은 더 이상 예전의 누나와 형이 아니었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남편, 그들에게 동생인 자신의 자리는 점점 더 줄어들었다.
류현재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
관념적으로 보면 가족은 단일한 최소의 집단처럼 보이지만, 그 속성을 들여다보면 완전한 타인들이 실타래처럼 엮어 들어 있다. 우선은 가족을 만드는 최초의 남편과 아내부터가 완전한 타인들 아닌가. 그 사이에 그들의 관계에 유일성을 부여하는 자식들이 태어나고 그 자식들은 또 완전한 타인과 결합함으로써 가족의 외형은 계속 불어난다. 애초에 넓게 본 공동체적 관계와 다르지 않다. 공동체사회에서 우리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듯이 가족 내에서도 관계가 복잡해지고 다양해질수록 수많은 역할들을 수행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처음 질문인 가족이란 무엇이지? 가족의 영역이라는 것은 어디까지지? 헷갈린다.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은 공동체에 가까운 인간 집단을 이상적인 개념으로 정의해 놓은 '가족'이라 부르려 하는 것 같다. 뜻을 같이 하며 생활이나 행동을 같이 하는 하나의 집단이라 여기면 서로에 대한 존중도 높일 수 있고, 공동의 목표를 향하는 방식도 조금은 더 담백할 것이며, 건강한 거리감이 존재하지 않을까. 이를 가족이라 불러보자. 아, 이미 내 머릿속에 형성되어 있는 '가족'의 개념도 끈끈하고 밀도가 높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고통스럽다. 서로에게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과한 기대, 요구, 의무, 동조성, 등을 꺼내 들게 된다. 그러지 말고, 우리 '가족'에 대해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함께 고민해 보자.
"다 틀려 먹었어. 그게 왜 옛날 일이야. 우리가 가족이었을 때, 지들이 우리 자식이었을 때, 우리가 지들 부모였을 때, 바로 그땐데……."
류현재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