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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림 Sep 01. 2023

별과 별 사이 막과 막 사이

 

 작은딸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친구 생일파티에 동네엄마들도 초대받아 아이와 함께 갔다. 일하는 나는 쉬는 토요일이라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다른 엄마들은 편한 복장으로 온 반면 나는 하이힐에 딱 달라붙는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시선을 끌며 저들은 날 부러워한다며 자위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정문에 다다랐을 때 한 발자국도 내딛기 힘들었다. 전날 남편과 심하게 다퉜기 때문이다. 골프를 치고 지금은 집에 와있을 것이다. 올려다본 아파트는 칸칸이 나눠진 납골당 같았다. 저 네모난 틀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내 영혼은 가루가 되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생각은 공포로 변했다.  

    

아이를 집으로 들여보내고는 주변을 몇 바퀴 돌다가 향한 곳은 백화점. 다리가 아팠다. 운동화를 사서 신었다. 신던 신발을 집어넣기 위해 보스턴백을 샀다. 청바지에 맨투맨 티까지 갈아입으니 한결 몸이 가볍다. 안데르센 동화의 ‘빨간 구두’처럼 어디든 춤을 추며 날아갈 것 같았다.      


백화점 옆에 있는 고속버스터미널로 빨간 구두는 나를 안내했다. 어느 곳으로 갈까요 목적지를 찍었다. 부산 해운대 밤 12시 고속. 큰아이에게 전화했다. 13살 먹은 큰아이는 엄마를 이해한다는 듯 알았다고 했다. 일터에도 통보했으니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된다.     


야호! 태어나서 처음이다. 나만의 시간, 혼자만의 여행. 해운대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5시 무렵이다. 바다내음을 가슴 깊이 긴 호흡으로 끌어당겼다. 어슴푸레 물든 새벽빛의 바다는 너무나도 찬란하고 섹시했다.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며 무작정 달렸다. 심장 수술로 인해 심어놓은 기계 판막 두 개가 널을 뛰며 미친 듯 요동쳤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몰아쉬고 다시 뛰고, 짹각짹각짹각짹각…고장 난 초침은 심장의 위험을 알리며 나를 멈춰 세웠다. 그제야 진정이 되었다. 처음 느껴본 자유 함에 눈물이 차올랐다.  

    

모텔을 잡았다. 쾨쾨한 방향제 냄새, 큰 거울, 피임 도구, 유리 벽 욕실, 19금 채널이 주는 가공된 모습은 낯설기보다 ‘이게 바로 너야’라고 가르쳐 주는 것 같았다. 이에 걸맞게 옷을 다 벗어던졌다. 천장에도 벽에도 붙어있는 거울 탓에 발가벗은 몸은 그대로 민낯을 드러냈다. 어색함도 잠시 마음이 편해졌다. 포르노 영화를 관람했다. 세렝게티가 따로 없다.     


배를 타고 거제도로 건너갔다. 갈매기를 바라보며 낭만을 즐기려 했지만 배 멀미는 나의 뱃속을 헤집어 놓았다. 속을 달래기 위해 해장국집을 찾았다. 뜨끈한 국물이 들어가니 좋다. 아침부터 여자 혼자서 밥을 먹으니까 의아했던 모양이다. 주인이 물었다. “아가씨는 아닌 것 같고, 이 동네 분도 아닌 것 같고, 혹시 작간겨?” 질문이 반가웠다. 나는 미소로 얼버무렸다. 그때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고개를 들어 윙크하며 내게 추파를 던졌다. 별 미친놈 다 있네, 하며 무시하기 싫었다. 나도 웃음을 흘렸다. 이게 다 19금 영화 때문이다. 곧 작업이 들어올 태세다. 두려움에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저녁에는 수산시장을 찾았다. 다큐의 현장이자 삶의 현장이다. 날것의 냄새를 맡으며 어느 한 곳에 자리했다. 주인아저씨는 친절했다. 혼자서도 먹기 좋게 회를 떠주었다. 소주도 땄다. 홀짝홀짝 마시다가 주인에게도 잔을 건네며 “사장님! 인생이 뭐라 생각하십니꺼?” 되지도 않는 사투리를 쓰며 물었다. “음_ 글쎄 뭐 별거 있습니꺼 인생이 다 그렇고 그런 거 아입니까” “네 그치요 다 갸갸갸갸 갸갸죠” 나도 내가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 푸념이 하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들어주지 않아도 위로하지 않아도 용기를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난 지금 너무 행복하다. 혹여 이 시간이 휘발되어 날아가 버릴까 소주잔을 들어 황급히 입에 털어 넣었다.    

 

나흘 정도 지나 친정엄마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애들 때문에 우리 집에 와계신다. 엄마는 울면서 “넌 도대체 왜 그러냐! 뭐가 문제냐 널 그렇게 안 키웠는데 어쩌고저쩌고” 또 신파가 시작되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늘 눈물과 감성으로 호소하고 유학도 못 가게하고 뭐든지 안 된다. 조심해라. 반대만 일관해왔던 엄마. 작은 딸아이도 “엄마 언제 와”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두 여자의 울음소리만 들으면 나는 죽은 사람이다. “알았어 알았어 내일 갈게” 하며 성급히 전화를 끊었다.     


아까운 마지막 밤이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의 별과 별 사이는 멀지 않다. 꿈에서 현실로의 이동은 한 걸음으로도 족해 보였다. 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인지 분명히 알려주는 것 같았다. 다시 네모난 틀로 돌아가야 한다. 그 틀은 아파트가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고 남편이 정해놓은 것도 아니다. 나를 옥죄는 나의 규범이, 사고가, 익숙한 관성이, 불안과 걱정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나의 틀을 남편은 모질게도 거부했고 나는 끼워 넣으려고 부단히도 애썼다. 돌아가면 부수지는 못해도 틀의 확장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의 2막의 시작이 언제냐고 물으면 그때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좀 더 단단해지고 좀 더 유연해졌다.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에 몰두했다. 이제 제3막을 준비한다. 예열 중이다. 시동은 걸어 놨다. 가출은 필수다. 부릉부릉~ 액셀만 밟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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