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네가 이겼다

by 기림


교실 밖 풍경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비둘기 한 마리가 푸드덕거리며 창가에 내려앉는다. 목을 앞뒤로 까딱이며 좌우로도 꺾는다. 반복적인 리듬에 맞춰 조롱하듯 움직인다. 누가 인간이고 누가 동물인가. 안과 밖은 철창을 사이에 두고 팽팽하다.

'네가 이겼다.'

똥을 한 바가지 싸지르고는 창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교과서 102페이지. 자 주목! 이 글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글쓴이의 마음은 뭐지? 오늘이 17일이니까 17번 대답해 봐!”


선생님의 차갑고 고압적인 말투에 17번은 기가 죽어 말끝을 삼켰다.


‘국민학교 3학년이 아저씨 마음을 어떻게 알아’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분필 하나가 나의 정수리를 스치며 날아갔다.

교과서 속 위인들의 얼굴은 온유하거나 강인하다. 나는 그런 얼굴에 콧구멍을 크게 그리고, 눈알을 튀어나오게 하고,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흐르게 그려 넣는다. 위인은 더 이상 위인이 아니었다. 내 손끝에서 그들은 우스꽝스러운 바보로 변했고, 그 모습은 내게 묘한 해방감과 쾌감을 주었다. 주변에 앉은 친구들은 내 그림에 낄낄댔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주시했고 분필은 자주 날아들었다.


부랴부랴 도시락을 먹고는 운동장에 나가 그네를 탔다. 버드나무 잎이 살갗을 스치고 바람이 힘을 보탰다. 무릎을 굽혔다 펴며 빛을 향해 돌진. 공중에서 솟구치는 기쁨은 한 여자아이의 자유 선언이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한 아이가 친구들에게 할 말이 있다며 복도 끝으로 데리고 갔다. 다급함, 떨림, 익살스러움이 그 아이의 표정에 동시에 묻어나 있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비밀인데 말이야…."


그 아이는 목소리를 낮췄다.


“00엄마가 선생님한테 돈 주는 거 나 봤다.”


00엄마는 학교 근처에서 분식점을 한다. 00과 함께 가면 어묵을 듬뿍 담아주곤 했다. 다른 엄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피-그게 무슨 비밀이야”


라고 허탈해하며 나는 버드나무 잎의 부드러운 감촉, 시원한 바람, 그 사이로 스며드는 빛과 그림자를 떠올렸다. 이 벅차오름이 교실 문턱을 넘는 순간 산산이 부서질까 봐 그것이 더 안타까웠다.


소문은 아이들의 입을 통해 금세 퍼졌고, 담임 귀에도 들어갔다.

선생님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교실 문을 쾅 차고 들어왔다. 듬성듬성 난 콧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꾹꾹 눌러두었던 분노를 마침내 터뜨릴 기세였다.


“누구야! 주둥이 나불댄 것들이 너야 너야! 너지 너지!”


아이들은 겁에 질려 마치 포승줄에 묶인 죄수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너! 너! 너!”


그렇게 다섯 명쯤 지목을 당했고, 나도 그 안에 있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없어 보였다. 익숙한 일이었다. 나는 또 당연하다는 듯 불려 나갔다.


선생님은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다짜고짜 칠판에 머리가 부딪칠 정도로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예전보다 훨씬 세찼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아픔이었다. 볼은 화끈거렸고 머리는 흔들렸고 몸도 같이 휘청였다. 한 대 두 대 나는 이유도 모른 채 맞고 있었다. 순간, 무엇을 잘못했는지 억지로라도 떠올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가 부정당할 것만 같다. 반성이라도 할 구실이 필요했다. 하지만 책이 그렇듯, 글자가 그랬듯, 어른들은 내게 이유를 주지 않았다.

엄마에게 달려가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선생님도 알고 있었다. 공부 못하는 아이는 집에서도 찬밥이란 걸.


그때는 내게 난독증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저 공부 못하는 아이로 불릴 뿐이었다. 나 역시도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게을러서 그렇다고 믿고 있었다. 나는 어른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그로 인한 상처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묘하게도 사람들을 웃기는 데 재주가 있었다. 그 웃음은 단순한 유머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른들이 빼앗아 간 내 권위를 되찾는 수단이었다. 누군가를 놀리며 얻는 즉각적인 반응은 나에게 존재의 확인을 주었다. 나는 그 웃음으로 나를 대신 세웠다.그래서 점점 더 공격적인 유머에 탐닉했고, 그 웃음은 누군가를 쓰러뜨려야만 오래 갔다.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긴 듯 보였지만, 그 승리는 오직 타인의 패배로만 증명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어른들의 폭력을 흉내 내며 나도 모르는 사이 그들처럼 물들어 갔다.



산책하러 집 앞 공원에 나왔다. 비둘기들이 잔디밭 위를 걷다 이따금 푸드덕 날아오른다. 순간 오래전 교실 창가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철창 안에서 세상을 비웃었고, 이제는 철창 밖에서 나 자신을 바라본다.

비둘기는 여전히 똥을 싸고,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누가 인간이고 누가 동물인가.

아마 이번에도 네가 이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