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딸의 시점

by 기림


얼마 전에 엄마의 프로필에 저장된 기린 그림을 남자에게 보여줬다. 예상대로 놀란 반응이었다. 그림 실력 때문이라기보다, 이런 그림을 그리는 엄마의 세계가 꽤 독특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의 표정에는 놀람과 함께 묘한 안도감이 스쳤다.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사람은 남의 조건을 쉽게 재단하지 않는다는 걸,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 같았다.


그는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화려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마치 빈 부분을 세심함과 다정함으로 채우려는 사람처럼 늘 차분했고 서두르지 않았다. 말보다 표정의 온기를 살피려 했고, 내 감정의 모양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나는 조금씩 기울었고, 기울어진 마음 위로 예상치 못한 안정감이 내려앉았다.


사랑은 그렇게 설명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들어 잔잔한 물결처럼 나의 일상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처음으로 이 남자와 부부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옆에서 계절을 맞이하고, 다음 계절도 함께 건너고, 그렇게 시간이 우리를 가족으로 만들어주길 바랐다. 이 마음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비로소 엄마에게 말할 용기가 생겼다.


엄마가 내 출근길 운전대를 잡아준 날,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엄마, 비밀인데… 나 남자친구 있어.”


엄마는 흘깃 나를 바라보았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지금 뭐라고 했어?”


나는 천천히 반복했다.


“남자친구 있다고. 1년 됐어.”


엄마의 입술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충격인지, 배신감인지, 반가움인지, 어떤 감정도 단정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한 번도 이성에 대해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적지 않은 나이에 남자 친구란 단어를 꺼냈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놀람은 곧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진짜? 어떤 사람인데?”


“어. 좋은 사람이야.”


“무슨 일하고?”

“학교는 어디 나왔어?”

“부모는 뭐 하셔?”

“어디 살아?”


엄마는 허기진 사람처럼 질문을 퍼부었다. 마치 무언가를 꼭 확인받아야 직성이 풀린다는 듯.

그러나 질문이 쌓일수록 내 기대는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사랑을 말했는데, 결국 검증된 건 사람이 아니라 조건이었다.


엄마는 다를 줄 알았다.

그 순간 엄마가 입고 있는 티셔츠의 기린은 더 이상 상징이 아니었다. 그저 천에 박힌 그림일 뿐이었다. 내게 기린은 자유롭고,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세계를 살아가는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엄마는 자기 세계가 아니라 세상의 기준에 끌려가고 있었다.

엄마는 세상의 시선이 두려워, 결국 지키고 있었던 건 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


또각또각. 엄마는 식탁 앞에서 노트북을 꺼내 자판을 두드린다.

가끔 나와 눈이 마주치면 뭔가를 들킨 사람처럼 멋쩍게 미소를 짓고, 숨을 길게 내쉬기도 한다.


냉장고로 가는 길에 스치듯 화면을 보았다. 스크롤은 길게 내려가 있고, 문장 끝마다 여백이 많았다.

지웠다 썼다를 반복하며, 엄마는 오래된 두려움과 마주한 채 자신의 마음을 적고 있었다.


나는 잠시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꺼냈다.

냉장고 불빛이 엄마의 어깨를 비췄다.


그 순간 알았다.

엄마도, 나도 서툴지만 자라고 있다는 것을.


엄마는 기린이 좋아서 그린 게 아니라, 더 멀리 보려고 애썼던 순간마다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기린의 목처럼

조금씩, 위로.


그리고 나의 사랑도,

엄마의 기린처럼

조금씩 위로 뻗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