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by 기림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지 어쩌겠어요.”


아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처음 우리 집을 찾은 유진 엄마는 거실을 한 바퀴 천천히 둘러본 뒤, 한숨처럼 이 말을 흘렸다.



21년 전 우리 부부는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도심 곳곳을 돌아다녔다. 같은 높이의 건물, 비슷한 색의 벽, 줄 맞춘 창들. 시야는 단순했고, 반복된 형태의 아파트들은 아무 표정 없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 사이사이로 단독주택과 빌라들이 흩어져 있었다. 각자의 모양은 있었지만, 손길이 더 필요해 보였다.

그렇게 걷다 우리는 한 아파트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정문에는 곡선과 장식이 어우러진 유럽식 문이 과시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화단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작은 정자 하나가 놓여 있고, 그 곁으로 감나무와 금잔화, 소나무들이 두 팔을 벌린 채 계절을 맞이했다. 크지는 않았지만 단정하고 아늑한 그 공간은 집의 품위를 드러내는 이곳의 얼굴 같았다.


그 고요한 풍경과는 달리 내부는 제법 호화로웠다.

고급 자재와 세심하게 설계된 구조, 자동 시스템과 엘리베이터, 촘촘한 보안 설비까지 이 집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렇게 독 채로 서 있는 나홀로 아파트는 조용히 자기 존재를 드러냈다.

대단지처럼 익명 속에 섞이지 않으면서도, 단독주택처럼 모든 수고를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곳. 우리는 이 아파트를 선택했다.

형편을 조금 넘어선 결정이었지만, 그 시절의 우리는 꽤 분별력 있는 판단이라 믿었다.


유진 엄마가 우리 집을 둘러보았을 때 나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괜히 설명하고 싶으면서도, 굳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음 한쪽에서는 우쭐함이 스쳤고, 다른 한쪽에서는 우쭐함이 들킬까 봐 서둘러 숨겼다.

기쁨이라 부르기엔 조심스러웠고, 불편함이라 하기엔 달콤했다.

그 순간은 그렇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나갔다.

다만 그 아무 일 없음이 다른 모습으로 돌아올 줄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며 집값의 질서도 바뀌었다. 표정 없던 대단지 아파트들이 기준이 되었고,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던 이 집은 그 흐름에서 비켜났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집들이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

숫자가 뒤집히자 감정이 흔들렸다. 분별이라 믿었던 판단은 다른 기준 앞에서 이름을 잃었다.


집값의 흐름이 분명해지면서 몇 차례 이동의 기회가 있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기회라 불렀고, 누군가는 갈아타기라 말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이동은 선택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필요와 욕망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았다.

투기처럼 보일까 조심스러웠고, 집 한 채 꿈꾸기조차 버거운 얼굴들이 떠오를 때면 그 망설임이 과연 정당한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가.



얼마 전 길에서 유진 엄마와 마주쳤다. 서로 안부를 묻고, 아이들 얘기를 조금 나누었다.

잠깐의 인사를 마치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유진 엄마는 대로 쪽으로, 나는 골목을 따라 걸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시 멈춰 섰을 때, 얼마 전 들었던 소문이 떠올랐다.

유진이네가 사는 대단지 아파트가, 이곳의 두 배가 넘었다는 이야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는 우리 집 층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는 순간, 오래된 말 하나가 조용히 내 뒤를 따라 올라왔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지 어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