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며 돋보기가 일상의 필수품이 되었다. 신문 글씨를 크게 보기 위해 들었던 돋보기를 이제는 세상을 읽는 마음의 도구로 쓴다. 최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유디트 폴가르의 Queen of Chess에서 본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의 모습은 돋보기 아래 선명하게 드러난 지성의 얼룩 같았다. 최고의 지성이라 칭송받는 그가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의 핵심인 '등(等)', 즉 만물을 차별 없이 비추는 평등한 지혜를 놓치고 아상(我相)에 함몰된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불교의 궁극적 지향점인 무상정등각에서 '등(等)'은 단순히 정확하다는 뜻을 넘어선 '평등심(平等心)'의 결정체다. 고대 인도의 브라만들은 태생적으로 자신들만이 청정하다는 선입견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붓다는 이 견고한 차별을 거부하며 "태생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 브라만이 된다"라고 선언했다. 비구니 승단을 승인하신 파격 또한 남녀라는 껍데기를 벗겨내고 누구나 평등하게 깨달음의 성품을 가졌음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진정한 깨달음은 나만 옳다는 '아상(我相)'과 상대를 낮게 보는 '편견(偏見)'이 사라진 수평의 마음 위에서만 완성된다.
카스파로프는 평소 “여성은 본질적으로 전사가 될 수 없다”며 여성을 비하해 왔다. 그의 오만함은 1994년 리나레스 대회, 폴가르와의 통산 5번째 대국에서 ‘1 프레임의 반칙’으로 그 민낯을 드러냈다. 30분의 1초라는 찰나의 순간, 그는 나이트를 내려놓으며 분명히 손을 뗐으나 실수를 깨닫자마자 규칙을 어겨 수를 물렀다. 당시 17세였던 폴가르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주심을 바라보며 당황했지만, 카스파로프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국을 이어갔고 결국 승리를 챙겼다. 이후 스페인 언론이 비디오 분석을 통해 그의 반칙을 명백히 지적했지만, 그는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양심은 깨끗하다"며 반칙을 부인했고, "왜 대국 중에 즉시 항의하지 않았느냐"며 오히려 폴가르의 책임으로 돌리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로부터 8년 뒤인 2002년, '러시아 vs 세계팀' 대회에서 성사된 20번째 대국에서 그는 마침내 폴가르에게 패배한다. 하지만 챔피언은 패배보다 더 큰 것을 놓치고 있었다. 그는 대국 직후 서둘러 자리를 뜨며 사과 한마디 건네지 않았고, 자신이 과거에 내뱉었던 여성 비하 발언이 틀렸음을 끝내 시인하지 않았다. 붓다는 자신을 향한 비난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평온함을 유지하며 진실을 수용하셨지만, 챔피언은 승부의 세계에서조차 자신의 아상(我相)을 내려놓지 못했다. 똑똑함(分別智)은 가졌으되 상대를 존중하는 '등(等)'의 지혜는 부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진정한 승리는 체스판 위의 기물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솟구치는 오만한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다. 모든 생명을 차별 없이 비추는 수평의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가장 높은 지혜의 다른 이름이다. 돋보기를 통해 세상을 보니, 남을 멸시하며 쌓은 승리의 성은 위태롭고, 평등한 시선으로 마주하는 마음은 단단하다. 오늘 다시금 내 마음의 돋보기를 닦아본다. 타인의 존엄을 내 몸처럼 여기는 그 평범한 진리야말로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삶의 품격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매주 월요일 아침 10시, <순야의 돋보기>를 통해 일상에 숨겨진 삶의 지혜를 하나씩 꺼내 보려 합니다.
돋보기를 갖다 대야 보일 만큼 작고 사소한 것들에서 인생의 큰 울림을 찾는 이 여정에 동행해 주세요. 글이 마음에 닿으셨다면 팔로우와 좋아요로 따뜻한 응원을 보내주시면 큰 힘이 됩니다.
한 주의 시작을 알리는 월요일 아침, 여러분의 마음에도 투명하고 평온한 돋보기 하나가 놓이길 바랍니다. 이번 한 주도 곁에 있는 이들을 선명하고 따뜻하게 마주하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