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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표 밀가루의 비밀

by 하이경

필자는 악수표 밀가루의 혜택을 받고 살아온 전후 기성세대에 속한다. 이 글을 접하는 누군지는 악수표 밀가루에 관한 전설 같은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거나, 혹은 아닐 수 있다. 내 기억에 악수표 밀가루는 애증이 덩어리로 엉켜있는 추억의 산물이며, 그 시절 한국인의 평균 키높이를 증대시킨 원흉 (?)으로 6.25 전후 미국이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우리에게 제공한 서글픈 구호 식량이었기 때문이다.

1950~60년대의 한국은 폐허 복구 재건의 시대였고, 전쟁의 상처를 오롯이 견디던 전세계 최빈국으로 대접을 받던 곤란한 시기였다. 당시에는 전 세계 각국으로부터 물자를 원조 받던 처지였고 특히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였다. 여러가지 산재한 문제 중 급선무는 식량의 자급자족 문제로서 당시 국가가 당면한 최대의 난제였다.

시대에 미국에서 기부형식으로 제공하던 이른바 '구호 식량'이라는 명목으로 살포된 악수표 밀가루의 배급이었는데, 식량부족으로 끼니 해결이 절실한 처지라 이것으로 죽을 끓이거나 (칼)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국민들 대부분은 밀가루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맛도 없고 소화도 안 된다며 불만이 있었는데, "구호 죽을 먹으면 속이 9번 뒤집힌다"는 웃기면서 슬픈 말들도 있었다. 그때 당시의 생활 형편을 생각하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힘겨운 시기였고, 워낙 식량 사정이 녹녹지 아니하여 이제는 화석되었지만 보릿고개가 엄연히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지금에야 한강의 기적이라고 말하는 경제발전 이전의 곤궁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던 사례들 중 하나였다.

그 시절을 대표하는 구호 식량은 요즈음 간간히 뉴스에 오르내리는 미국 국제개발처(USAID)에서 제공한 인도적 차원의 무상원조품이었고, 너나없이 궁핍하던 시기에 밀가루, 옥수수, 또는 감자 전분 같은 곡물을 해마다 수십만 톤씩 십수 년 동안 지원했었다. 물론 나를 위시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당시 악수표 밀가루로 만든 칼국수나 수제비로 하루 3끼 중 1끼를 해결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항간에 '밀 것'으로 통하던 밀가루 식량은 원래 먹던 곡식과는 식감도 다르고 입맛에 익숙하지 않아 호불호가 좀 갈렸지만, 그래도 그 시절을 지나며 한국인 대부분이 '밀 것' 요리에 익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서민에게는 다소 생소한 소금 빵이나 라면을 비롯하여 자장면 같은 각종 면류로 만들어진 밀가루 분식 문화가 한반도에 단단히 터를 잡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미국에서 정권을 틀어쥔 트럼프 정부가 머스크와 짝짜꿍을 주도하여 우리를 원조한 역사를 지닌 미국 국제개발처(USAID) 폐지를 추진하고 있는 모양세다. USAID는 연방법에 따라 설립된 국무부 산하 공적개발원조 기관이다. 머스크는 본시 호적에 없던 신설 부서인 정부효율부 (DOGE)라는 괴뢰부서(?) 수장이 되었고, 여기에 가세하여 트럼프는 DOGE를 전폭 지지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로 하여금 전 세계에 인도적 차원의 차관이나 개발도상국의 식량 지원 프로그램에 결핍이 우려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DOGE의 칼춤 행위는 억지가 아니라 그들에게도 뭔지 말 못 할 당위성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트럼프 정부에서 무작정 USAID를 없애려는 건 아니며, 예산을 비효율적으로 쓰거나 미국의 이익과 상관없는 곳에 지원을 한다는 비판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트럼프는 무엇에 빈정이 상해서 눈이 뒤집혔는지 모르지만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해외 원조보다는 자국의 경제와 안보에 집중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머스크도 정부 기관들의 예산 낭비를 콕 집어 문제를 삼아 왔는데, USAID도 그중 하나라고 보는 것 같다. 그 이유는 USAID에서 원조하는 수혜 대상국이 현지의 부패를 부추기거나, 미국 의도와는 사뭇 다르게 흘러간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이 기관의 축소나 폐지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USAID가 사라지면 개발도상국의 인도적 지원이 대폭 줄어들고,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외교적 영향력이 취약해질 것임을 상당히 우려하고 있다. 결국은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문제라서 쉽게 뚝딱 결론이 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다.


한편으로는 USAID의 공적개발원조 지원 자금이 CIA의 지하 공작금으로 유입되어 흐른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런 의혹은 낭설이 아니라 종전부터 알게 모르게 증거 불충분의 소문으로 흘러나왔던 음모 수준의 얘기다.

USAID는 단순한 범인도적 차원의 국가기관이 아니라 미국의 외교 전략과 정보활동에 깊이 얽혀 있다는 이야기가 많았고, 실제로 냉전 시기에는 USAID가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CIA의 지하 활동을 감추거나, 특정 정권을 약화시키는데 역이용됐다는 증거들이 제시된 바 있다.

심지어 아프간의 아편 세력을 지원해 왔다는 의혹은 꽤 오래된 이야기다.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최대의 아편 생산국 중 하나인데, 미군이 주둔했던 동안 오히려 아편 생산이 더 증가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USAID가 공식적으로는 농업 지원과 재건 사업을 위해 자금을 지원했지만, 그 돈이 결과적으로는 아편 재배를 증산하는 용도로 쓰였다는 의혹이 불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일부 패널의 주장에 따르면 미군과 미 정부가 아프간의 거대한 마약 경제를 직접 통제하려 했고, 심지어 CIA가 비밀리에 개입해 마약 자금이 특정 세력의 자금줄이 되도록 방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탈레반은 2000년대 초반 자국의 아편 생산을 강하게 규제하려 하였지만, 미국의 개입 이후 다시 아편 생산이 급증한 걸 보면 의심을 살 만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다만 이게 전부 의혹 수준이라 확실한 증거가 나온 건 많지 않으며, USAID가 정치적 군사적 목적과 연결돼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완전히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보긴 어렵다는 점도 있다.

CIA는 미국의 국익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지만, 그들의 임무수행 과정에는 논란도 많다. 냉전 시기부터 해외 정권 교체 공작 활동, 정보 수집 등을 해왔고 때로는 미국 정부조차 통제하기 어려운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쿠데타 지원, 비밀 작전, 심지어 비윤리적 실험까지 연루됐다는 의혹들이 많았고 특히 중남미, 중동, 아시아에서 CIA가 특정 정권을 유지하거나 전복하는데 개입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온 적이 있다. 이란(1953년), 칠레(1973년), 과테말라(1954년) 같은 사례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공식적 임무는 미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정보기관이지만, 글로벌 패권 유지라는 더 큰 그림 속에서 움직여 왔다고 볼 수 있기에 CIA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필요악이라고 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서 분쟁과 혼란을 조장하는 공식적으로 허가받은 지하 조직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중남미나 아프리카,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 USAID가 지원한 단체들이 친미 정권을 유지하거나 반미 정권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있으며, 쿠바의 경우에는 USAID 프로그램이 사실상 반정부 활동을 지원하는 도구로 쓰였다는 문서도 공개된 적이 있다. 그렇다 하여 USAID 전체가 CIA와 연계된 건 아니라고 판단되지만,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데 USAID가 중요한 도구였던 것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배경을 근거로 추정하자면, 트럼프나 머스크가 USAID 축소나 폐지를 주장하는 것이 비단 운영 예산의 낭비 문제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기축 통화국의 지위로 막강한 달러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은 의외로 책임져야 될 문제들도 많다. 미국이 기축통화국으로서 누리는 혜택이 엄청난 만큼, 그에 따른 책임도 전혀 없지 않다는 것이다. 달러 패권 덕분에 미국은 막대한 적자를 내면서도 굶지 않는 유능한 거지처럼(?) 거대 경제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고, 세계 금융 시스템을 사실상 통제할 수 있었다. 그만큼 제3세계나 여타의 나라 경제에도 영향을 크게 미칠 수 있는 만큼, 원조나 국제 개발지원 같은 적선자의 역할을 일정 부분은 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는 건 아니다. USAID 같은 기관이 축소되거나 없어진다면 미국의 국제적 책임이 축소되는 방향으로 볼 수도 있고 그들 내부적으로는 예산 절감이나 미국 우선주의 논리가 있을 수 있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미국의 글로벌 영향력이 쇄락하여 어쩌면 심하게 훼손될 수도 있음을 염려해야 할 것으로 판단한다.

미국이 달러 패권을 앞세워 세계 기축통화국 지위를 유지하려면, 단순히 자국 우선주의의 경제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세계가 미국을 신뢰하고 미국 시스템에 의존해야 하니 낙후된 국가 원조를 중단하거나 축소하면, 단기적으로는 지지층에 어필할 수 있겠지만, 국제적 반발의 저항이 만만치 않게 거세질 여지도 있다. 결국 이런 변화가 또라이('도널드'의 발음 오류) 트럼프 시대에 미국의 입지를 어떻게 바꿀지가 관건이다.


힘겹고 가난하던 시절, 무상원조의 고마운 기억을 지닌 나로서는 기묘하게 색깔이 변해가는 미국을 비난하거나 그들이 베풀어준 은혜를 망각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USAID는 1983년까지 꾸준히 한국을 지원했고, 그사이 원조해 온 프로젝트는 화력 발전소, 시멘트 공장, 나일론 공장 등의 사회간접시설을 비롯하여 대단위 거주단지(AID 아파트)가 있으며, 심지어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AIST)도 USAID의 차관 600만 달러로 설립되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끼친 호혜나 공과의 차원을 떠나 기축 통화국의 지위를 빌미로, 목마르다 싶을 때면 언제든 제 맘껏 달러를 찍어내 통화량과 이자율을 함부로 제어하여 유동성이 허약한 가난한 국가로부터 알게 모르게 삥을 뜯어내고, 국제조약이나 동맹관계 질서를 마구잡이로 흔들어 재끼고 있는 미국(이 아니라) 트럼프 정부는 21세기에 이르러 지구촌의 깡패 국가로 전락하고야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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