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분 가능이면 연속이다
사뭇 엉뚱한 이 표현은 일반적 언어표현 수단이 아니기에 철학적 맥락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발주하다"라는 어의는 보통 물건이나 작업 혹은 서비스를 주문하다는 뜻이기에 발주자인 주체나 수주자인 객체가 없다면 성립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말을 의역하자면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을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주문하라”는 뜻이므로, 원하는 삶이나 생애의 목표를 스스로 만들어가라는 의미로 재해석할 수 있다. 인생이라는 게 뭔지 거대한 의미가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존주의자를 위시한 물질 (유물)론자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상투적으로는 내면에서 답을 구하라거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를 이끌어 가라는 메시지를 담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장사꾼이나 사업가나 연구자를 비롯한 어떤 직업을 막론하고, 단순한 자기 계발의 차원을 넘어서 자기 주도적 탐구와 자기의 가치 창조를 지향하라는 지침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사상을 연구자의 입장으로 제한하여 서술하자면, 지식의 수동적 소비자가 아닌 능동적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닭 모이를 주듯 그저 남이 던져주는 주제나 트렌드를 추종해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질문을 스스로 설정하고 그에 대한 연구를 직접 설계하고 수행하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외부로부터의 명령(발주)이 아니라, 내면의 요구로부터 시작하라는 지침이기에 주제나 목표가 외부의 과제, 평가, 시류 따위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진정으로 궁금한 것, 생전에 기어코 해결하고 싶어 하는 문제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자기 철학의 관점으로 세상의 질문에 응답하라는 메시지이기에 단순히 데이터를 처리하거나 탐구 결과를 논문으로 작성하는 생계형 기술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세계관과 사상을 바탕으로 진리를 찾아 나서는 절대적 존재라는 믿음의 발현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먹고 살아가는 것이 연구의 테마일 수 있겠지만, 연구를 먹고사는 테마로 결정하였다면 남이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질문하고, 그 질의에 답하기 위해 자신의 길을 여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구라는 행위의 개념을 상실하게 되면 연구자로서는 이미 수명을 다했다고 판단하여 과감하게 다른 길로 궤도를 수정해야 함이 타당하다. 추구하는 바 그 길이 제 스스로 부여한 인생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것이 실존이고 곧 실존의 철학이다.
평생을 10급 공무원(?) 뽕나무밭 관리인으로 만족하며 살았던 장자가 만약 열역학을 알았더라면, 절대 온도의 개념과 매우 흡사한 절대 자유의 철학적 사상을 지닐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열역학적 절대 온도(-273.15 °C)의 상태함수(즉, 엔트로피 따위)를 미분하는 것은 가능하거니와, 절대 온도 그 요소 단위를 미분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의미가 없다. 절대 자유처럼 절대 온도란 추상적 정의로서 열역학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수학적으로 살펴보자면, 절대 온도의 개념은 열역학적 특성이 무의미해지는 특이점으로 그 지점에서 물리적 상태 함수는 정의될 수 없거나 불연속적일 수 있다. 따라서 절대 온도를 미분으로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가 열역학적으로 부적절하다. 이 의미는 엔트로피가 최솟값(이론적으로 0)에 도달한 상태로, 실제로는 달성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절대 자유의 개념도 이와 다르지 않다. 현실의 세계에서는 성취(도달)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들의 집합으로 무수히 엉켜있건만, 미적분처럼 뭉텅 거려 땡! 하고 떨어지는 확실한 답이란 그리 많지 않다고 봄이 타당하다. 수학적 관점뿐만이 아니라 실존의 차원에서도 미분 가능이면 그 함수는 연속이다. 절대 온도를 미분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떠한 열역학적 개념도 파괴가 가능하다.
혹여, 절대 자유가 존재한다면 절대 온도와 유사할 것이다. 먹고사는데 전혀 쓸데없는 베르그송과 하이데거를 툭하면 곧잘 언급하시던 지식인이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나는 내 아버지로부터 배웠고, 또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