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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점을 잃은 그대에게

소실점((消失点)그 마법에 대하여

by 하이경

눈이 속는 그 찰나의 순간을 아시는가? 길게 뻗은 철도, 무한히 이어지는 복도, 도시의 거리 풍경을 담은 사진 속에서 우리는 어느 순간 눈이 '속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두 줄의 선이 평행하게 뻗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 갈수록 점점 좁아지다 결국 하나의 점으로 모여드는 시각의 임계점. 우리는 그것을 소실점 (Vanishing Point)이라 부른다. 이 소실점은 단순한 시각 사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각 속 허점을 파고든 착시효과의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가 세상을 평면에 담으려 할 때, 실제 세계의 3차원 깊이를 2차원으로 번역해야 하는데, 그 과정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바로 원근법이며, 그러한 지각의 번역 중심에 소실점이 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단순한 시각적 착시 효과가 사람들의 공간 지각의 인지과정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걸까?

이는 뇌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시각 정보를 처리할 때 기존 경험과 추상의 맥락에 의존한다. 말하자면 멀리 있는 사물은 작아지고, 가까운 것은 커진다는 '추상적 규칙'을 내면화한 뇌는, 선이 좁아질수록 '멀리 있다'라고 판단한다. 이처럼 소실점은 실제 거리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공간감을 만들어 내므로 평면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예술가들은 이 착시 효과를 일찍이 간파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단일 소실점 기법을 통해 신의 시선을 담아내고자 했고, 근 현대의 사진작가와 건축가들은 이를 활용하여 구성미와 감성적 몰입감을 조율하기도 한다. 심지어 게임 그래픽이나 가상현실에서도 이 착시는 현실감을 불어넣는 핵심 요소다.

소실점은 시각능력의 초월점이자 시력을 상실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소실점의 착시효과는 시각적 마법이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왜곡된 채로 받아들이는가를 보여주는 철학적 은유이기도 하다. 현실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그대로는 아니라는 점이다. 눈은 보고, 뇌는 믿는다. 그리고 그 사이의 빈 틈을 소실점은 교묘히 파고든다.


“이메일 확인하셨어요?”

“이메일이요? 저는 그런 건 안 해요.”

이 대답에 상대방은 당황한다. 마치 저는 아직 달구지 타고 다녀요! 라고 한 것 같은 반응이다. 이쯤 되면, 이메일을 모른다는 건 디지털 시대에서는 ‘야생의 생존자’쯤으로 치부가 된다.

그러나 한 발짝 물러서 살펴보자. 이메일이 과연 삶의 필수재인가? 수신 메일함에는 날마다 ‘긴급’, ‘중요’, ‘지금 확인’, ‘프로모션’ 이라는 제목이 수십 개씩 쏟아진다. 그중 정작 중요한 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이번 주에도 회의 있습니다”, “10% 할인 쿠폰이 곧 만료됩니다”, 혹은 “자료룰 다시 보내드립니다(3차)” 같은 것들이다. 피곤하게도 이메일은 언제부턴가 일상의 의사소통 도구라 아니라, 업무 스트레스의 주범 내지는 공범의 혐의를 벗어날 수 없는 지목의 대상이 되었다.


이메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메일을 몰라서 회신이 늦은 게 아니라, 애초에 메일이 안 온다. 그들의 ‘받은 편지함’은 항상 0이고, 디지털 피로도? 그런 건 안드로메다 이야기다. 이들은 주로 전화를 걸거나, 직접 찾아가며 손 편지를 쓰기도 한다. 물론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라는 소리를 종종 듣지만, 본인은 전혀 억울하지 않다. 연락이 안 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늘 연락이 가능한 상황으로 사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회의 중에도 회의에 집중하고, 밥을 먹을 땐 오로지 밥에 집중한다. 의당 이들에게는 회의 참석을 증빙하는 회의록에 연대 책임용 서명은 있지만 당연한 이행 여부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또 밥상에 올라온 현란하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촬영한 사진도 없다.

이메일을 모르고 산다는 건, 디지털 사회에서 한 발 물러서 있는 삶이다. 일견 불편할 것 같지만 의외로 편안하다. 중요한 일은 결국 사람을 통해 오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그들의 방식은 결코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다. 느리고, 단순하고, 조금은 엉뚱해 보일 수는 있어도, 마음만은 누구보다 가볍다. 오늘도 그들은 메일 알림 하나 없이 하루를 시작한다. 그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이메일에 관심이 없을 망정 연락의 여유와 평안을 아는 어쩌면 진짜 '스마트한' 사람은 그들일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은 이메일을 모르고 살아왔는가? 아니면 이메일이 없던 시절을 모른 채 태어나 디지털 소통이 당연한 세상에서 자라왔는가?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삶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서글픈 시간 함수에 함몰되어 애석하게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몇 줄의 글을 쓰기 위해 편지지와 흰 봉투를 꺼내고, 정성들여 내용을 마무리한 다음 또박또박 주소를 적고 침을 발라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밀어 넣은 후 며칠간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던 시간. 그 시간에는 다소 불편함이 있었지만, 거기에는 기다림의 미학이 켜켜이 쌓여 있다. 당신이 이메일을 모르고 살아온 세대라면, 그 느릿한 흐름 속에서 답장이 오는 기쁨과 ‘한 문장에 담겨있는 진심’을 더욱 또렷이 기억할 것이다.

살다 보니, 어느 순간 혁명처럼 느닷없이 찾아온 이메일이라는 시스템이 삶의 방향을 대차게 바꾼 것은 분명하다. 클릭 한 번으로 국경을 넘고, 수백 명에게 동시에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편리함은 이 시대의 필수 기능처럼 자리 잡았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메일을 확인했는지 안했는지? 왜 빨리 답장을 안 하는지? 보낸 메일이 혹시 스팸으로 분류 된것은 아닌지? 같은 보이지 아니한 무언의 우려와 압박이 우리를 괴롭힌다. 하루에도 수십 통 쏟아지는 알림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일’에 시간을 쓰고 사는 걸까?

반면, 이메일이 없던 시절을 모르고 살아온 이들에겐 디지털 소통은 곧 삶이다. 답장이 빠를수록 성실하고, 메일함이 비어있을수록 불안해지는 세상. 그들에게는 ‘편지지의 향기’도, ‘한 통의 소식을 들고 온 집배원’도 퍽이나 낯설기만 하다. 누군가에게는 ‘없던 것’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이 된 이메일. 그 사이에서 우리는 묻는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더 편리해졌고, 또 얼마나 더 외로워졌으며, 그만 소실된 아날로그 정서는 어디로 갔는지를...

기술은 삶을 빠르고 편하게 바꾸지만, 저마다 품고있는 서사나 마음의 속도까지 바꾸진 못한다. 이메일을 모르고 살아온 당신은 어쩌면 더 느리고, 덜 연결되어 있었지만, 더 깊고 단단한 관계 속에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이메일이 없던 시절을 모르는 당신은, 언제든 연결될 수 있지만 그 연결이 꼭 은은하고 따스한 온기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총총 깨닫게 될 것이다.


소실점의 착시를 알고 있지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듯, 놓치고 있던 느림의 미학과 속도의 유용함 사이에서 진정한 소통이란 뭘까를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지금쯤, 디지털 만능이라는 비정한 조명의 싸늘한 그림자에 불쌍하게 옹크린 아날로그를 찾아 보듬어줘야 할 때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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