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빙자한 암살의 기록
역사 속 수많은 갈등의 끝에는 ‘암살’이라는 극단적 수단이 바닥을 장식한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조용히 사람을 죽이는 암살은 개인의 고유한 생명을 차압하는 경지를 넘어 체제와 질서를 흔들고, 때로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불씨가 되기도 했다. 본시, 살인이란 인간적 방어기제라는 철학적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살인은 시대를 불문하고 도덕적 혹은 율법적 범죄 행위의 영역이기에 절대 금기시된다.
물론, 훨씬 이전의 시대에도 있어왔던 사실이건만 암살의 대표적 사례는 로마황제 시저(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피살이다. 기원전 44년, 그는 양아들이자 동료였던 브루투스를 비롯하여 친하게 지냈던 원로원들의 칼에 쓰러졌고, 이는 곧 로마 공화정의 종말과 제정 로마의 시작으로 이어졌다.(으윽... 컥! 브루투스 너까지...) 이 사건의 의미는 암살이란 곧 하나의 정치적 언어로 작동하며, 단순한 개인에 대한 공격이 아닌 체제 전복이나 역사적 전환의 신호탄으로 기능해 왔다.(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로마 황제들은 그 누구보다 암살에 취약했다. 술에 취하여 노상방뇨 도중 졸지에 칼을 맞은 칼리굴라를 비롯하여 미치광이 네로, 카라칼라 등의 황제는 권력의 절정에서 자신이 만든 공포와 혼란의 산물로 목숨을 잃었다. 중세 유럽의 종교 권력자들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페인의 대귀족 보르자 가문에서 태어나 역사상 최악의 부패 교황이란 오명을 남긴 알렉산데르 6세, 성직자임에도 여러 여인들을 취하여 직접 인정한 자식만 8명이었고 그중 3명은 어머니가 누군지조차 밝혀지지 않았던 알렉산데르 6세의 의문사 역시 권력 다툼의 한복판에서 발생한 암살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근대에 들어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낭트칙령을 내렸던 프랑스의 앙리 4세는 종교 관용 정책을 추진하다 광신도에게 처참히 암살당했고, '스웨덴을 넘어야, 러시아가 선다'라고 주장하며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던 명군 표트르 3세는 자국민의 쿠데타로 암살 당했다. 프랑스혁명의 한복판에서 단두대에 오른 루이 16세의 처형은 ‘제도화된 암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역사도 암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권력 찬탈을 둘러싼 암투 속에서 수많은 왕족이 희생되었으며, 세조가 저지른 단종 폐위와 암살은 조선 정치사의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다. 대한제국의 독립을 전제로 자행된 암살의 기록은 그야말로 부지기수이고, 근현대에 와서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의 역사 또한 그러하다. 문제는 이 모든 비극이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현대에도 암살은 테러나 쿠데타의 형태로 여전히 등장하며, 불안정한 정권과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다. 이는 단순히 한 인물의 제거만이 아니라, 체제의 허약과 갈등 구조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신호로 봄이 타당하다. 우리는 이러한 암살이라는 극단적 행위가 발생하는 사회구조적 원인을 성찰해야 한다.
암살이란 비단 인간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개미의 세계에서도 쿠데타 전략이 있고, 자객 개미는 페로몬 조작 속임수로 여왕개미를 직접 살해하는 은밀하고 목적성이 분명한 암살 행위가 벌어진다. 본시 생태계의 속성이 그럴지는 몰라도 개미뿐만 아니라 마이크로 미니어처 세계에서도 엄연히 암살이 존재한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죽여야 살고, 살려면 또 죽여야 하는가? 공생은 없으며 공의란 정당하다고 판단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