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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속의 역사

옴니버스 콩트 : 미끼와 당의정

by 하이경

이름만 대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투자신탁회사에 근무하며, 적어도 투자와 관련한 본업에서 만큼은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를 자처하던 민수가 출중한 실력을 바탕으로 투자했던 회사들이 환율이라는 숨은 변수의 특이점 여파로 하여금 줄줄이 파산과 도산을 거듭하고 말았다. 그가 담보하였던 거의 모든 '진실된 보상'이란 것들은 마치 손에 쥔 물처럼 빠져나가 사라졌다. 절망에 허위적이던 민수는 그동안 적극 투자를 독려한 바 있었던 강변의 노인에게 달려왔다.


"어르신, 이 모든 게 거짓말이었어요... 제가 그토록 신뢰하던 숫자들이, 우상향을 지속하던 주식의 보장된 약속들이, 며칠 만에 물거품으로 사라졌고 전부 다 사기였습니다...!. “


그의 하소연을 듣던 노인은 낚싯대를 차분히 들어 올리며 절망하던 민수에게 눈길마저 주지 않았다. 하지만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히 민수에게 말한다.


"거짓을 걷어내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진실이지. 하지만 자네의 투자실력으로 거짓말을 믿었을 때 느꼈던 열정과 그럴싸한 희망적인 설계 만큼은 진짜였음을 알아야 하네. 그게 바로 자네가 치러야 할 따뜻한 거짓말의 대가인 샘이지..."

"따뜻한 거짓말이라고요....?"

"그렇다네, 이제 자네도 나처럼 낚시하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판단하네. 지금 자네가 겪고 있는 세상의 요 다음번 미끼가 무엇 일지를 자네 스스로 알아보려면 말일세... "


박 교수는 거의 반평생 철학을 연구하며 살았다. 그는 퇴임 후에도 역사의 냉소적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평생을 바쳐 기록된 거의 모든 역사가 '승자의 서사'이며, 정치와 권력자의 횡포를 정당화하기 위한 거대한 허위의 탑이라고 믿었다. 그는 흔히 말하는 염세론자는 아니었건만, 노벨 문학상 따위의 문학작품을 분석하여 나름의 철학을 피력 하였는데, 그 작품들이 인류에 미친 선한 영향력을 배제한다면 실제로는 역사적 거짓말을 가장 아름답고 설득력 있게 포장하는 도구였다고 냉소했다. 그리하여 문학상으로 치장된 명예를 ‘그럴듯한 거짓말을 가장 멋들어지게 잘하는 자에게 주는 명예’일 뿐이라는 게 그의 사변적(思辨的) 지론이었다.


민수가 투자사기로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된 그 해 늦가을, 박 교수는 도시 외곽의 거대한 공동묘지를 찾았다. 그의 눈에 비친 묘비는 한결같이 유사한 형식들이었다. 출생과 사망 연도, 그리고 입에 담을 수 있을 만큼의 각종 미사여구로 음각이 된 업적들. 마치 개개인의 복잡하고 모순된 삶은 싹 지워지고, 사회가 원하고 요구하는 '위대한 인간'이라는 어지럽고 지저분한 껍질만 남은 듯했다.


박 교수는 한 지인의 묘비 앞에 섰다. 묘비명에는 '정의로운 시민이자 훌륭한 아버지'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박 교수가 이미 알고 있던 묘비의 장본인이 살아 생전 저질렀던 비열한 도덕적 배신행위와 가족에 대한 무책임하고 싸늘한 행적들을 낯낯이 알고 있던 터였다. 어둡고 저속했지만 부유했던 그의 삶은 기록된 묘비명과 정반대의 미사여구로 채워져 있었기에 박 교수는 묘비를 바라보며 조소했다. 그는 절규하듯 중얼거렸다.


"아, 이 모든 위선을 흙으로, 아니면 허언의 묘비로 덮은들 뭘하나? 행적의 은폐가 가당키나 한가? "


그때, 근처에서 박 교수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묘지를 관리하던 늙은 인부가 풀 베는 기계를 잠시 멈추고 흐르는 땀을 주먹으로 닦아내며 대답했다.


"교수님, 진실은 이미 땅속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그 진실은 건드리기에 너무 날카로워 아무도 그것을 파헤치려 하지 않죠. 왜냐고요? 저 묘비의 거짓말이 남은 이들의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희망이니까요. “


인부는 쓰다듬듯 묘비를 손으로 쓸었다. 그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망자에게 예의를 다하듯 조심스러웠다.


"이 당당한 거짓말이 없다면, 저분의 손주들은 할아버지를 증오하게 될 겁니다. 이 미끼가 없으면, 며느리를 비롯한 자손들의 남은 삶은 저주와 고통 속에서 살겠죠. 우리는 저 기록이 완벽한 거짓말임을 알지만, 그 거짓말 덕분에 자식들은 아버지를, 아내는 남편을, 사회는 시민을 사랑할 수 있는 실질적 명분을 얻습니다. 개인의 서사를 확대한 역사의 거짓말은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이유를 제공하는 거룩한 거짓말입니다. “


박 교수는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이 추구해 오던 진실은 고독하고 파괴적이었지만,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매달리는 거짓이야말로 그들에게 연대와 희망을 주는 유일한 구원이라는 역설적 깨달음이었다. 박 교수는 묘비를 향하여 고개를 숙였고 그 거룩한 거짓말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였다. 그는 묘지를 떠나며 생각했다. 자신은 평생 역사철학을 연구해 왔건만 이제는 깨달았다. 강변 노인의 바늘 없는 낚시방법은 비록 고결할지 몰라도, 미끼를 물지 아니한 다른 고기들을 구원하는 따뜻한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 새삼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박 교수는 더 이상 역사를 해체하지 않았다. 그는 역사를 그저 인간들의 고통과 체계의 모순을 덮기 위해 만들어낸 따뜻한 미끼의 기록으로 바라보며 도시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자서전은 아마도 가장 아름답고도 거룩한 '거짓말'로 기록될 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가장 진실되고 따뜻한 유산이 될 것임에 스스로를 자위하며 낄낄 미쳐갔다. / 끝


토인비의 역사관은 문명의 탄생이나 소멸의 실체를 인종, 환경이 아니라 도전에 대한 응전을 어떻게 해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그는 거시적 시각으로 문명의 흥망성쇠를 분석했지만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 문학적(허구) 관점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을 종종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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