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 콩트 : 미끼와 당의정
노인은 젊은 시절 여러 회사를 경영한 적이 있었기에 상당한 부를 축적한 바 있었다. 노인이 특히 애정을 쏟았던 사업은 도시를 짓는 건설 분야의 사업이었고, 나름은 도시 재생에 대단한 관심과 열정을 쏟았다. 그는 은퇴 후, 매일 아침 도시 외곽의 강가에 앉는다. 그의 낚싯대는 이제 더 이상 고기를 낚아 올리는 사냥 도구가 아니었다. 비록 작동은 하되 시침이나 분침을 상실한 고장 난 시계처럼 흘러가는 시간의 상징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허울 낚시로 온종일 시간을 죽이던 노인은 고독했으나, 한편으로는 그의 주변에 알게 모르게 서로 인사를 나눌 정도의 이웃하는 지인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그의 옆에는 잘 나가는 투자신탁회사의 젊은 투자전문가 민수가 종종 함께 앉아 있었는데, 노인의 정보를 사전에 파악한 투자전문가 민수는 은퇴한 노인에게 최신 투자 상품과 '안정적인 미래'라는 고급스러운 미끼를 은밀하게 살포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르신! 자본주의 문명은 해를 거듭할수록 진보하는 겁니다. 제가 소개하여 드리는 이 투자 상품은 앞으로 20년간 따뜻하고 안정적이며 보다 편안한 노년을 약속합니다. 이건 어르신의 보람찬 젊은 시절을 담보한 '노력의 진실된 보상'이자 결과를 집약한 최고의 선택 상품이랍니다.”
노인은 버릇처럼 강 건너편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가 지은 도시의 마천루와 도도한 빌딩들이 한낮의 햇빛에 쨍하고 반짝였다.
“젊은이, 내가 평생 지은 이 도시 자체가 가장 큰 미끼라네. 문명은 진보한다고? 그건 더 많은 사람을 낚아 올리기 위해 던지는 가장 저급한 약속 일 뿐이지. 나는 평생 미끼를 물고 살았는데, 은퇴해서 마저 다시 바늘을 또 물어야 하겠는가?”
민수는 노인의 말이 허무맹랑하다고 순간 생각했지만, 사전에 파악한 노인에 대한 정보와 입소문대로 영업대상으로서 만만치 아니한 내공을 지녔다고 판단하여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기로 결심한다.
“어르신은 여러 곳에 분산하여 투자를 하심은 물론이고, 더구나 소시민을 위하여 뜻있는 장학 사업까지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품을 추천해 드리는 선의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건강하시고요 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끈덕지게 노인을 설득하던 민수는 허구한 날 노인에게 쓴소리를 들어가며 허탕을 치며 돌아 같다.
민수가 노인을 찾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던 가을 즈음, 어느 날은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학자 스타일의 신사가 노인에게 불쑥 캔 커피를 건네며 그에게 말을 건네왔다.
“미끼통을 제외하면 노획으로 보이는 게 없으니, 조업상황이 만만치 않은가 봅니다. 혹시 포획한 고기 어망을 강물에 담가두셨는지요?”
“아니요, 그냥 낚시처럼 보이기만 하는 허울 낚시 중입니다. 그러니까 고기들에게 밥을 나눠주는 뭐 자선행사 같은 허튼 행위지요...”
“히야...! 매우 철학적이면서도 고고한 행위로군요. 감탄했습니다. 궁금해서 여쭙습니다만 낚시의 진정한 목적에 대해서 감히 여쭤도 될까요? 아 참,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길 건너편 대학교에서 빌어먹고 사는 박 아무개 교수입니다.”
“교수님이시라...? 이 낚시의 목적이 궁금하시다면 제게 우선 교수님의 전공을 말씀해 주시지요. 하나씩 주고받는 공정거래란 본시 그런 겁니다.”
“그렇군요, 저의 주 전공은 근대철학과 법철학이고 부전공은 자연과학부에서 뇌 과학을 전공했습니다만, 학부생들에게 주로 역사철학이나 과학철학을 강의하며 먹이를 구하고 있습니다.”
”흐음, 역사철학이라...? 그런 학문도 있었는지 나로서는 생소합니다. 아무튼 하나를 받았으니 답을 드리지요... 이건 그냥 낚시를 가장한 매복(埋伏) 중 이라오, 그게 아니라면 잠복(潛伏)이 맞으려나...?”
“그러니까, 말하자면 공권력을 지닌 수사기관 같은 곳에 근무를 하시는군요. 어르신 변장 솜씨가 기가 막힙니다. 아하하...!”
“그럴 리가 있겠소? 생업에서 은퇴를 한 지 15년을 족히 넘겼으니 이건 변장이 아니라 보이는 그대로 본시 늙은이가 맞소. 아하, 이제야 저쪽에 범인이 모습을 드러내는군요.”
그때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노인에게 다가와 “선생님, 오늘은 제가 좀 늦었지요? 아이들과 각개전투를 치르느라 지각을 하고 말았어요!” 라며 예쁘장한 김밥도시락을 환하게 펼쳐 놓았다. 노인이 김밥 한 개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말했다.
“두 분 서로 인사하시지요, 이쪽은 강 건너 압구정에서 도시락을 배달해 온 서윤 양, 그리고 이쪽은 길 건너 대학교에서 역사철학을 가르치시는 박 아무개 교수님!”
둘은 서로 어색한 목례를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눴지만, 서윤의 고혹적인 자태와 아름다움에 짐짓 놀라 어리둥절한 박 교수는 서먹함을 지우려는 듯이 농담처럼 한마디를 던졌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타깃으로 매복 중이셨다니 또다시 감탄합니다. 도대체 서윤 낭자께서는 무슨 죄를 지으셨기에...?”
“저는 선생님께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을 만큼의 은혜를 입었으니 앙갚음이라는 범죄 이상의 범죄를 저지른 샘이지요. 안 그래요 선생님? 호호...”
바늘 없는 낚싯줄에 새로운 미끼를 엮어 낚싯대를 힘차게 던지던 노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자면, 내가 베푼 것은 보잘것도 없지. 다 자네가 행한 각고의 노력이었고, 스스로의 성취가 아니었던가? 은혜를 입었다면 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입었다고 보는 게 맞지. 젊은 시절 길고양이 돌보듯 한 그까짓 학자금 몇 푼을 아직도 갚아야 할 은혜로 여기는 자네가 지금은 퍽이나 부럽네... 그리고 지금껏 내게 손수 배달해 오는 맛있는 도시락 만으로도 그 앙갚음은 충분하다고 보네, 그러니 이제 그만좀 하라고 몇 번을 얘길 해도 곧이듣지 않으니 하구한날 내가 이렇게 잠복을하고 있어야지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노인과 서윤은 서로 깔깔 웃으며 주변 얘기를 이어갔고 어느새 빈 도시락 그릇을 챙긴 서윤이 “아이들 때문에 서둘러 가봐야 합니다. 담 주에 또 봬요 선생님! 그리고 교수님도요... 기회가 되면 또 뵙도록 해요, 반가웠습니다.” 하는 깍듯한 인사말을 남기고 서둘러 그들의 곁을 떠났다.
서윤이 떠난 이후에도 노인과 박 교수는 시답지 않은 일상의 뻔한 얘기를 주고받았으며, 해가 기울어 노을이 질 무렵 박 교수는 자리를 털고 있어 섰다. 언제쯤 시간이 허락되면 대포라도 한잔 하자는 어설픈 제안을 하며 돌아서던 박 교수가 노인에게 질문을 하였다.
“어르신께 은혜를 입었다는 아까 그 서윤 양은 우아하고 지적이며, 또한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 탐이 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서윤 양의 연락선을 알고싶고, 제가 순수한 마음으로 연락을 취해도 상관이 없겠습니까?”
“도덕을 미끼로 하지만 않는다면 인간적으로 실례가 될게 무에 있겠소? 누구나 탐낼 수 있는 훌륭한 인성을 지닌 맑은 여성이니 좋을 대로 하시오. 다만 그녀는 유부녀이자 아이의 엄마이고 또 유치원을 경영하느라 교수님처럼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소만...”
“어르신과 서윤 양의 첫 만남이 궁금해서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오래전에 그녀에게 학자금을 제공하셨다니, 물론 장학재단에서...”
“그건 아니오! 원하는 답이 아니라 놀라실 것 같소만... 내가 서윤 양을 처음 본 것은 사업체를 운영할 때 종종 드나들던 거래처의 룸살롱이었고, 그때 서빙을 하던 아가씨들 중의 한 사람이었소.”
“.........!”
낯빛이 심하게 일그러진 박 교수를 진정시키기라도 하듯 노인은 찬찬히 주변의 미끼와 낚시도구를 정리하며 검붉은 노을을 등진 채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음모를 내포한 먹음직스러운 미끼와 겉은 달착지근하고 알맹이는 쓰디쓴 당의정은 목적상 동질이지만, 하나는 죽음을 제공하되, 다른 하나는 삶을 제공한다는 점이 크게 다르지요...."
"........?"
"자, 여기 두 사람의 여대생이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용돈벌이나 다른 어떤 것에 목적이 있어 제 스스로 접대부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본시 집안 형편상 더 배울 기회를 놓쳐 직업으로 접대부를 선택하였소만, 각고의 노력 끝에 어렵사리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소. 현명하신 교수님께서는 두 사람 중 누구를 응원하고 또 누구를 평생의 친구로 선택하시겠소...? 한 인간의 거짓된 역사나 그럴싸한 기록들은 알맹이보다 포장지가 우선하는 법이오.”
곧이어 노인이 총총 앞장을 서고 박 교수가 무겁게 그 뒤를 밟으며 땅거미가 지고 있는 강변의 공원을 거의 빠져나올 무렵까지 두 사람은 서로 침묵하였다. / 끝
진정한 선의(善意)는 일방적 시혜가 아니라, 갚음으로 완성되며 보람으로 되돌아오는 진리를 말한다. 길고양이 돌보듯 했다던 '그까짓 학자금 몇 푼'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당의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