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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할 수 있는 자유

옴니버스 콩트: 장오(張悟) 리벤지 스토리

by 하이경

장오(張悟)는 도회지의 강가에서 생애 마지막 날의 낚싯대를 드리웠다.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의 선함과 악함의 두 가지 재료로 적당히 버무려진 현대문명의 허위를 알고서도, 오로지 구경꾼처럼 그저 관조로 일관하며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이룩된 거짓말에 협조하는 '미필적고의' 임을 깨달아 스스로 최후를 어떻게 마감해야 할까를 숙고하는 차원에서였다. 그는 미끼통을 천천히 강물에 비운 후 족적의 근원인 신발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였다.

그의 딸 수현은 '따뜻한 거짓말' 속으로 회귀하였건만, 그 알량한 온기가 얼마나 허약한 껍질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도시는 더 이상 단순한 사냥터가 아니었다. 그들은 디지털로 모든 것들을 기록하고, 포장하고, 재편집하여 마침내 다른 거짓말을 제작해 내는 수준이상의 막대한 기록이 만드는 일종의 시스템이었다.


장오의 결심은 단순했다. 스스로를 기록할 수 없거나 또는 기록되지 아니하는 존재로 만들어 내는 것. 역사는 모든 인간을 기록하여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러한 의미부여 자체가 기만이라는 판단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을 향한 최후의 리벤지는 '기록되지 않음'으로써 시스템의 욕구를 좌절시키고, 그들이 진실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인지를 폭로하는 일이었다.


그 시간에 박 교수는 시청의 복잡한 절차를 밟고 있었다. 그는 은퇴 후에도 시청의 기록 관리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이번 임무는 '존재는 하지만 기록이 없는' 노인들의 행적과 신원 조사를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그중 가장 골치 아픈 대상이 바로 장오였다.


"이 사람은 도대체 왜 기록이 없습니까? 재산, 연금, 주소, 가족관계… 딸이 하나 있다는 것 말고는 유효한 정보가 전무합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길이 없어요."


시청 직원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박 교수는 웃었다.


"그 양반은 본인의 기록을 거부한 사람이니까요. 문명이라는 미끼를 물지 않고, 한발 뒤로 물러나서 뱀 장사나 사기꾼의 허튼 야바위 수법을 대하듯 세상의 질서를 조롱하고 구경꾼처럼 관조만 했던 사람입니다. 그 양반의 표현을 빌리자면 법률이나 도덕을 포함하여 역사, 종교, 과학, 심지어 국가 시스템마저도 본래 없는 것을 있다고 믿게 만드는 사상고문 행위를 이름하여 곧 문명이라고 비판하였으니... “


“에헤...? 그러니까 이 분이 믿었거나 믿고 싶었던 것들은 아무것도 없다는 기막힌 상황인 거로군요. 아무튼 이상한 양반일세... 직업이 철학자이신가요...?”


“아뇨, 철학은 아시다시피 제 전공이고..., 이 양반이 신뢰하는 것은 오로지 딱! 하나. 순수한 야생의 자연만큼은 믿어 의심치 않았지요. 강아지나 고양이, 또는 뱀이나 지렁이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말입니다. 사냥을 위하여 매복을 일삼는 맹수들마저 그건 그들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지 결코 사기는 아니라는 겁니다. 자연을 기만하고 제멋대로 편집해 놓은 문명이라는 허위는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자 신이 부여한 축복이랍니다. 아하하...!”


“짐작 커니와, 교수님께서는 이 분을 깊게 파악하시는 걸로 미루어 평소에 친분이 있으신가 보군요. 혹시 정신적으로 문제는 없으신가요?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그것도 아닙니다. 낚시를 취미로 하고 있기에 동네 근처의 강변에서 몇 번 조우했을 따름이죠. 다소 특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이상한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얼마 뒤, 장오가 사라졌다. 그는 강변에 의자와 낚싯대, 우산 그리고 자신이 즐겨 입었던 도포 한 벌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의 딸 수현이 관계기관에 행방불명으로 실종 신고를 하였기에 경찰과 수사당국은 그의 행적을 찾느라 혈안이 되었지만 CCTV에 촬영된 흔적도, 유서도, 목격자도, 더구나 자살의 흔적이나 직접 증거인 시신마저 찾을 수 없었다. 실종수색은 이후로도 몇 주간 계속되었지만 딱히 유의미한 단서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문명이라는 장치에 완벽한 공백을 제공하였다. 물론 그가 소유했던 적지 아니한 부동산과 유체동산들은 실종되기 훨씬 이전에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유언장대로 집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민법조항에 제시된 실종자 처리에 관한 법률상 5년의 설정기한이 도래해야 하므로, 생사 여부가 불확실한 까닭에 대부분의 행정절차는 말끔하게 처리되지 못했다.


장오의 실종은 단순한 행방불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기록이라는 시스템에 대한 철학적 테러였다. 박 교수는 장오의 딸 수현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를 마주한 수현은 놀라우리 만큼 침착하고 또 담담했다.

"아버지는 평소에 하시던 말씀 그대로 승화적(昇化的) 종말을 선택했다고 생각해요. 세상의 거짓말에 더 이상 기록이라는 쓰레기를 보태고 싶지 않으셨겠죠? “


민법에서 지정한 유예기한 5년이 도래할 무렵, 박 교수와 시청은 딜레마에 빠졌다. 장오를 실종자로 사망 처리하려면 '사망의 실제적 경위나 물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진실은 없었고 또한 실종사실이 허위라는 증거도 없었다. 사건을 실종으로 처리하자니 '생존의 거짓말'을 계속 유지해야 했고, 사망으로 처리하자니 물적 증거가 전무했으므로 그의 연금과 재산의 일부는 무기한 공중에 뜰 터였다.


결국, 시청은 이렇다할 대책을 찾지 못하고 장오의 파일을 미결로 닫아야 했다. 박 교수는 최종 보고서의 '사망 원인 및 최종 기록'란을 기입하지 않고 여백에 '원인미상'으로 서명해야 했다. 박 교수는 그 공백을 응시했다. 그는 자신이 평생 증오했던 역사적 거짓말이, 이 작은 파일 하나를 놓고 얼마나 절박하게 의미를 만들려 애쓰는지 보았다. 하지만 장오는 그 모든 미끼를 거부하고 순수한 '무(無)'로 돌아감으로써, 시스템의 피동적 기록 욕구를 완벽히 차단하여 마비시켰다.


박 교수는 보고서에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대신 그는 텅 빈 난에 포스트잇으로 다음과 같이 메모를 남겼다.

"존재의 소거(消去)에 대한 완벽한 미결 -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유일한 진실이란 기록 그 자체를 거부하는 행위 즉, 거부의 자유에 있었다. “


장오의 이름은 도시의 모든 기록부에서 영원한 '미결' 상태로 남았다. 그의 파일은 삭제되지도, 수정되지도, 완성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문명의 거짓말에 대한 최후의 반항이었으며, 막강한 정보력을 자랑하던 현대문명의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되었다. 매년 연금 수령 확인기간이 되면, 시스템은 장오의 이름을 불러야 했고, 그때마다 담당 직원은 "알 수 없음"이라는 굴욕적 진실을 입력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향한 장오의 진지한 복수였다.


그는 물리적으로 시스템을 파괴하지 않았다. 단지 '기록을 통한 허위사실'을 거부함으로써, 시스템이 영원히 만들어내지 못하는 진실(장오의 존재)을 마주하여 능동적 강제를 수행하도록 설계된 장오의 계략이었다. 관조자는 끝내 그토록 저주하던 문명의 시스템을 완전히 오염시킨 샘이 되었다. / 끝


미셸 푸코는 기록 자체가 곧 권력이며, 현대 사회의 모든 시스템(병원, 감옥, 학교 등)은 개인을 기록하고 분류함으로써 통제하고 규율한다고 규정했다. '인간은 역사를 기록하여 존재 의미를 부여하지만, 의미부여 그 자체가 기만'이라고 본 것은 푸코의 담론 및 권력 비판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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