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의 날카로움에 대하여
우리는 가끔 멈출 수 없는 욕망에 휘둘릴 수 있다. 더 많은 재산, 더 좋은 차, 더 높은 연봉, 혹은 타인에게 존재함을 부여받고 싶어 하는 인정욕구 등등...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이를 ‘눈먼(맹목적) 의지’로 정의했다. 마치 며칠 굶주린 사람이 모든 사물을 음식으로만 평가하고, 갈망하듯 인간은 늘 잡히지 아니한 무언가에 허기져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고통이고, 세상은 답이 없다."라고 외친 지독한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에게 세상은 맹목적 생존 의지가 지배하는 전쟁터였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갈증을 느끼는 건, 애초에 이 "의지"라는 녀석이 만족을 모르는 괴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생은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오가는 시계 추(錘)와 같다."고 요약하곤 했다.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고통스럽고, 막상 채워지면 금세 질려서 무료함에 빠진다는 거지만, 냉혹하면서도 반박하기 힘든 통찰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핍이 예술로 승화되거나, 혹은 끔찍한 권력의 광기로 변질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그대는 아시는가?
1. 음악이라는 이름의 사기최면, 바그너와 니체
소위 유명인으로서 쇼펜하우어 철학에 가장 먼저 매료된 사람은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로 알려진 바 있다. 그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거대하고 웅장한 선율에 담아냈다.¹ 쇼펜하우어를 스승으로 여기던 젊은 시절의 니체는 초기에 바그너의 음악을 접하고 "인간을 초월할 힘을 얻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바그너가 점점 민족전체주의(나치즘)와 종교적 색채를 벗어나지 못하자 냉정하게 돌아섰다. 예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집단적 최면을 야기시키는 도구가 되었다고 냉정하게 판단했기 때문이다. ²
2. '초인'을 오독하여 니체 철학을 훔쳐간 악랄한 독재자
니체는 스스로 한계를 깨는 강한 개인, 즉 ‘위버멘쉬(초인)’가 되라고 악을 썼다. ³ 그러나 이 아름다운 자기 극복의 철학은 역사상 가장 위험한 인물에게 도둑을 맞고 마는데, 바로 히틀러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니체가 말한 ‘강인함’ 즉 초인을 ‘타인을 짓밟는 폭력’으로 오해하였다.⁴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힘으로만 다스리는 ‘패도(覇道)’의 길을 선택한 셈이 된 것이다. 철학이 오만하고 몽매한 권력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것은 사상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흉기가 되었던 참혹한 인류의 역사가 되고 말았다.
3. 우리는 지금, 어떤 것에 굶주려 있을까?
21세기를 살고있는 우리는 민족전체주의(나치) 치하에 살고 있지 않지만, 전혀 동일한 다른 의미의 ‘전체주의’에 수감되어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네트워크의 알고리즘과 얼토당토 아니한 더 많은 성과주의 요구에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 시대의 고통이 실체적 굶주림에 근거한 ‘배고픔’이었다면, 현대인의 고통은 놀랍게도 과잉의 '포만'이 그 원인이라고 추정한다. 쉴 틈 없이 파고드는 SNS의 알림과,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바그너의 웅장한 음악에 취했던 선량한 대중들처럼 자신도 모르게 자아를 상실하고 번아웃의 구렁창에 빠지게 된다는 점이 그것이다.⁵ 과잉의 피로는 현대인이 겪는 새로운 형태의 굶주림이건만 눈치채기가 어렵다. 왜그럴까? 몰라도 상관없는 쓰레기 정보의 융단폭격 속에서 오히려 자아는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이니 이것을 현상으로 인지하기가 기어코 쉽지만은 않다.
4. 처방전: '눈먼 의지'말고,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자아를 찾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이 맹목적인 의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실존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세상이 정해준 답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미래로 던져라(기투)."⁶ 그리하여 여기에 동양의 지혜인 ‘수처작주(隨處作主)’를 더해보면 혹여 답이 있을 수 있다. 내가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휘둘리지 않고 실제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보라는 것이다. 즉, 주체라는 의미를 일깨워야 한다는 점이다.⁷
우습게도 일주일을 굶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뻔히 알 수 있다. 내 육체의 본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본능을 이겨내는 내 정신의 힘이 무엇인지를... 거창한 권력(히틀러)이나 화려한 환상(바그너)에 기대 봐야 그건 죄다 헛것이라는 것은 딱 일주만 굶어보면 알게 된다. 악보 없는 삶이라는 무대에서, 적어도 한순간 자신만의 고독한 선율을 연주해보는 말하자면, 타의로 편집된 '표상'이 아닌 자기 '의지'의 발현을 추천하고싶다.
5. 결론: 일주일을 굶어보면 철학이고 지랄이고 죄다 통달하여 '초인'에 이르게 된다.
아무나 '초인'을 경험할 수는 없기에 다소 험난한 과정이지만 일단, 굶다 보면 느닷없이 통찰하니 안심하고 실행해도 무방하다. 의학적 차원의 정신치료 효과는 전혀 보증할 수 없으나, 다이어트 효과는 물론이고 식량절감과 거의 모든 자극으로부터 해방이 가능하다. 정작 없어서 굶는다는 것은 서럽고 피곤하되, 있어도 먹지 않는 절식은 '의지 수행'의 경험이니 서러움과는 상관이 없다. 혹여, 수행 도중에 굶어 죽을 수 있는 아사(餓死)가 우려된다면 의당 실행치 않음이 마땅하기에 아래에 서술하는 간접경험 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1일~3일 차] 쇼펜하우어적 자각
"의지는 맹목적이고 고통스럽다" 처음 며칠간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생존 의지'가 온몸을 지배하며, 머릿속엔 오직 '음식'이라는 욕망뿐이다. 이성이 본능의 노예가 되는 단계로서 평소에 지녔던 고상한 취향, 체면, 가치관 따위가 얼마나 나약한 '의지의 장식품'이었는지 불현듯 깨닫는다. 삶의 본질이 결핍과 고통이라는 쇼펜하우어의 통찰이 뼛속까지 파고든다.
[4일~6일 차] 바그너적 환각과 히틀러적 유혹
허기가 극에 달하면 정신은 명료해지기도 하지만, 반면 환상에 빠지기 쉽다. 바그너의 음악처럼 웅장한 보상을 꿈꾸거나, 히틀러처럼 "누군가 내 먹을 것을 뺏어갔다"는 적개심(권력 의지의 왜곡)이 생길 수 있다. 내 고통의 원인을 외부(타인, 가족, 사회)로 돌려 분노를 폭발시키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시기다. 전체주의적 광기는 대개 이런 '극한의 결핍'에 기인한다. 거의 대부분이 이 단계에서 그만 '수행 의지' 절식을 포기하고 만다.
[7일 차] 니체적 초월과 실존적 '도(道)'의 완성
일주일을 버텨낸 끝에 도달하는 지점으로 육체의 아우성을 정신으로 누르는 단계를 넘어, 비워진 상태 자체를 관조하게 되고 평안함을 얻게 된다. 내가 이 굶주림(고통)을 일부러 선택했거나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순간, 나는 저열한 욕망에 끌려다니는 짐승이 아니라 삶의 주인(초인)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고통을 긍정하는 힘"이며, 비로소 동양철학에서 언급하는 '비움(空)의 미학'을 체험으로 확인하게 된다.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는 해탈의 경지와 유사하다.
[각주 및 문헌참조]
1)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9). 그는 음악을 "의지 그 자체의 직접적인 사본"이라고 정의하며 예술 중 최고로 쳤다.
2) 니체. 《바그너의 경우》(1888). 니체가 바그너의 음악적 퇴폐성과 민족주의를 비판하며 쓴 후기 저작.
3)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고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위버멘쉬' 개념의 핵심 문헌.
4) 들뢰즈. 《니체와 철학》(1962). 니체의 '권력 의지'가 지배욕이 아닌 창조적 에너지임을 해설하며, 나치의 오용을 학술적으로 비판함.
5) 한병철. 《피로사회》(2010). 현대 사회가 규율 사회에서 성과 사회로 변모하며 개인이 스스로를 착취하게 되는 과정을 실존적 관점에서 분석.
6) 샤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6). 인간은 본질이 정해지지 않은 채 태어나 스스로를 만들어가는(기투) 존재임을 강조.
7) 임제 선사. 《임제록》.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의 출처로, 어떤 상황에서도 주체성을 잃지 않는 선(禪) 불교의 핵심 사상.
'눈물 젖은 빵'은 서럽고 비참하기에 추천하지 않는다. 일말의 의지를 추구하여 일주일을 굶어본 사람은 세상의 어떤 선동에도 속지 않는다. 배고픔을 아는 자만이 진정한 자기 의지의 주체가 된다. 하지만 간접 경험만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다. 그대는 지금 물리적으로 배가 부른 (과잉의 포만) 상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