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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경 Apr 05. 2022

직업의 붕괴에 대하여

허술해 보여도 잘 나가면, 그것이 진짜 실력이다.

  해바라기의 꽃말은 동서양이 서로 차이가 있다. 연모나 숭배를 이야기하는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생명과 행운의 상징으로 여겨지곤 한다. 해를 쫓아가노라는 습성에 따른 의미와, 풍성한 결실에 기인하는 생존력을 상징하기에 꽃말이 지닌 의미의 차이가 분명하다.

  세상일이 다 그러하듯 어디에도 양지 없는 음지란 존재할 수 없고, 평생 양지만을 추구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양지에 서 있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음지란 무엇을 의미할까? 양지의 섬광이 강할수록 음지 드리워진 그림자는 더욱 선명하고 짙어진다.


  원문을 필사하던 중세(15세기) 유럽의 필경사는 농노같은 일반 노동자보다 수십 배 높은 수입을 받던 고소득층 전문직이었다. 대부분 라틴어에 탁월한 실력자 이거나 일부는 성직에 종사하던 수사였는데, 필사본 성경 한 권을 탈고하면 어지간한 농장 하나를 살 만큼 큰돈이었다. 하지만 이 직업은 느닷없이 날벼락을 맞는다. 구텐베르크가 저지른 인쇄술의 혁명으로 저렴한 성경이 대량으로 생산되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필경사들은 모두 일자리를 잃고 농노나 비숙련 노동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그나마 간신히 명목을 유지해 오던 라틴어 문명을 초토화시켰고, 결국 유럽 문화의 뿌리였던 라틴어는 점차 사어가 되어 화석이 되고 만다. 쓸모없는 전문지식과 쇠퇴한 기능은 새로운 문명의 파도에 난파되기 마련이고, 양지의 붕괴는  경고를 생략한 채 느닷없이 다가온다.

  백과사전으로 유명한 브리태니커 출판사는 18세기에 설립되었고, 한때 2,000여 명의 사원 중 최고 학력의 박사급 편집자만 100여 명이 넘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던 순수 지식 기업이었다. 이들이 근 250여 년 동안 백과사전을 만들고 편집하는데 지출한 돈만 해도 10억 달러(약 1조)를 상회하였다고 전해진다.

  21세기에 이르러 브리태니커의 명성은 박살이 났고,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상실하여 종말의 전철을 밟았다. 2012년 브리태니커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인쇄본 백과사전의 생산중단을 선언했고, 치명상을 입어 서서히 죽어가는 맹수처럼 지금은 화려한 이름만 남아있다. 지구촌에 산재한 내로라하는 지식인들과 네티즌이 함께 참여한 위키피디아라는 형편없는 공짜 백과사전에 점령을 당하여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인터넷의 1/5에 속하는 World Wide Web이 등장했을 때, 이들은 이미 위험성을 인지했건만, 전자책이나 Web 버전의 정보 집약적 미디어로 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그저 넉넉한 주급과 안정된 복지에 안주하여 출퇴근과 루틴잡(Routin job)을 일삼다가 순식간에 전 직원이 몽땅 일자리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때의 양지는 해가 기울면 반드시 음지로 변하는 법이다.

  공학적 개념의 엔트로피를 엉뚱하게 차용한 사실 때문에 이른바 습자지 학자로 명성을 크게 훼손당했던 제러미 리프킨은 그의 저서에서 인간의 노동은 필연코 감소해 가는 역사적 전환기에 진입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자신의 전공분야와 달리 생뚱맞은 과학론 해석의 오도로 이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호된 비난과 질타를 당했을망정, 리프킨은 실천경제학에 한 획을 그은 유명한 학자이다.)


  현재 우리는 알게 모르게 노동의 종말을 일상적으로 목격하고 있다. 눈치 백 단의 부동산이나 불로(금융) 소득, 순자산 소득 등이미 노동소득을 추월한 지 한참 오래 일이고, 지하철은 검표원이 없어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은행 창구의 직원을 통하지 않고도 필요한 현금을 조달할 수 있고, 항공사 직원이 없어도 항공권 출력과 좌석을 본인의 선택으로 배정받을 수 있다. 그 많던 창구의 서비스 직원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당연히 그들은 정리 해고되어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났거나, 아니면 구직 낭인(산업예비군)으로 전락하여 도시의 콘크리트 숲 어디쯤 음지에서, 과거 따듯하고 햇살이 넉넉하던 양지를 도모하고 있다.


  이른바 고용사회란, 사회 구성원 거의가 기업이나 공공기관 등 제도권 조직의 구성원으로 종사하는 사회이며, 각국의 경제를 쥐락펴락 하는 주체로 개인적 삶의 표준이 되는 사회로, 포드 자동차의 컨베이어 시스템이 잉태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생산기반 사회이다. 한때 미국의 성인 인구 중 공장 노동자가 60%에 달하도록 그 숫적 양적으로 고용을 증가시켰던 포디즘 사회는 100여 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종말을 고했고, 소위 ‘프리에이전트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들은 기업에 고용되어 있지 아니하고 독립적으로 일을 하는 전문가, 프리랜서, 컨설턴트, 자영업자 등으로 현재 미국의 제조업 분야 노동자 숫자에 비하여 거의 2배에 달한다.

  고용사회의 붕괴는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정보기술이 장대한 서막을 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론칭하는 무대에서 “이 쪼그만 장난감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바꿀 것”이라고 공언했는데, 그의 예언은 여지없이 적중하여 상당수의 직업들이 이것으로 하여금 사라졌고, 마치 장식품처럼 도시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공중전화기나 팩시밀리, 전자계산기 따위들은 이미 화석이 되었다. 스마트폰의 판매량은 PC보다 무려 5배 이상으로, 2022년 현재 사용자는 대략 70억 명 수준으로 PC업계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쥐라기를 지난 공룡들이 화석이 되는 것처럼 마이크로소프트사 역시 화석이 될까 두려운 나머지 특단의 대책으로 윈도 10 버전을 무료로 업그레이드하였다. 지구상 인구 과반수, 경제 활동 인구 대다수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모양새가 되고 보니 소프트웨어를 탑재한 모바일 기기의 뛰어난 확장성에 놀랐기 때문이다. 모바일 기기류들은 인류를 실시간 지구촌의 세상으로 만들었고, 드디어는 어느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한 연결로 통합된 세상이 되었다.

  페이스북에는 7억 명 이상의 사용자와 거의 700억에 달하는 매트릭스 연결고리가 있다. 현재 지구상에는 이런 모바일의 망 기술 말고도 증강현실을 비롯한 획기적인 신기술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고, 더구나 비즈니스 전반에 관한 한 만만치 아니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궁즉통이니 꼼수로 해결을 해야 하나? 그래서 어쩌라고를 반복해야 하나? 별도의 신멸 한 대책이 없다면 올바른 정보가 필요하다. 해마다 증보로 발행하고 있는 유엔미래보고서에 따르면, 2030년까지 현존하는 일자리의 80%, 즉 20억 개의 일자리가 소멸되거나 대체된다고 주장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것은 우리들의 자녀가 직면해야 하는 거의 정확한 현실이다. 직업이 사라진다는 전망은 섬뜩한 위기처럼 느껴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양지가 음지로 변하면, 또 다른 양지가 생겨나는 법. 미래에는 아무나 누구나 생산 수단을 보유할 수 있을 것이고, 변화만큼이나 기회도 반복되어 제자신 스스로 정보를 생산할 수 있거나, 수집한 정보를 가공하여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고용 붕괴에서 보다 자유로울 것으로 판단한다.

  지금을 살아가는 기성세대로서 주변의 후학에게 추천하자면, 우선 직업으로부터 과감한 탈출을 시도함이 바람직하다. 고유한 직업이나 평생직장은 붕괴되고 없으니, 직업을 찾아 좀비처럼 도회지구석을 헤맬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제는 제 자신 스스로를 고용해야 한다는 점인데, 문제는 망설임보다 실질적인 행동이 중요하다. 왠지 허접하고 객관적으로 허술해 보일 망정, 진정한 용기와 남다른 추진력을 지녔다면 잘 나아갈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진짜 실력이다. 그것이 실패건 성공이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누구의 일생이 되었건 양지와 음지는 반복으로 교차가 될 터이니...


  거의 반평생을 법무부 10급 공무원(형무소 생활)으로 소진한 70대 중반 노인을 강원도 여행길에 만난 적이 있었다. 뙤약볕이 근사한 속초해변 벤치에 앉아, 단무지를 안주로 깡소주를 마시던 그에게, 혹여 기회가 주어진다면 앞으로 뭘 해보시고 싶으냐고 묻던 나에게 그는 가라고뿌(종이컵)를 건네며 이렇게 얘기했다.

"평생을 음지에서 살았으니, 가능하다면 양지뿐인 사막에서 죽고 싶소. 내가 알고 있는 사막이라야 고작 사하라뿐인데, 혹시 선생께서는 거기보다 더 가깝고 경치 좋은 사막을 알고 있소?"

  수년 전의 에피소드이니, 지금쯤 그는 소원대로 음지라고는 전혀 없는 광활한 사하라나 내가 일러준 중앙아시아 고비 사막의 양지에서 행복한 최후를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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