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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경 Nov 13. 2022

행복한 죄책감에 대하여

불행했던 기억이 행복일 수 있을까?

  현대 컴퓨터의 완벽한 기초를 마련한 앨런 튜링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독특하게 동성애자였고 이것에 발목이 잡혀 지지리도 한 고생을 거듭하다가 - 일부러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과를 먹고 자살로 일생을 마감한 사실이 있다. 청산가리(시안화 포타슘) 냄새는 생아몬드 냄새와 비슷한 살구을 품고 있는데, 사과에 청산가리를 주입하면 도대체 그 맛과 향이 어쩔지 매우 궁금해서 참을 수 없다. 자살을 시도할 작정이 아니라면 맛과 향이 아무리 궁금해도 부득불 참아야 할 일이다.


  한입 쓱 베어 먹은 사과를 로고로 사용하고 있는 애플 컴퓨터의 창업스티브 잡스는, 평소 존경해오던 튜링의 마지막을 함께한 청산가리 주입 사과를 오마쥬 하여 회사의 로고를 디자인하였노라며 공식적으로 밝힌 적이 있다.

  그런 까닭에 혹여, 당신이 애플 폰이나 또는 애플 컴퓨터인 맥의 사용자라면 그리하여, 한 입 베어 먹은 사과 디자인이 고상하며 파격적이고 보면 볼수록 이뻐 보인다면? 지독하게 위험한 아름다움이라는 패러독스임을 알고 빠져들었거나, 아니면  차라리 모르고 좋아했던 맹목적 사실이 훨씬 나을 수도 있다. 놀랍게도 사과 독성을 지닌 청산가리를 듬뿍 함유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각설하고, 아무튼 튜링은 그 자신 매우 독특한 여정의 인생을 살았고 고유한 그만의 생을 스스로 수렴하여 마감하였다고 판단해야 한다. 그 증거로 생전의 튜링은 쓸데없이 고민이 많았다. 정수 0은 반드시 1로 수렴 가능하지만, 자연수 1은 과연 0으로 수렴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이미 무한의 영역과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던 튜링의 단순한 고민이었다. 천재가 아니라면 이따위 별 이상한 걸로 고민을 삼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진리의 할머니라는 수학도 인과율을 거부할 수 없으므로 아래질의에 방정식을 세울 수 있다면,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 100%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친(또는 외) 할머니가 있기 전에, 과연 당신은 어떤 존재였을까?" 

  이것은(유한의 확률과 멱집합의 개념을 도입하여 방정식을 세울 수도 있겠지만...)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율의 문제다. 이 문제는 난센스 퀴즈가 아니므로 답을 공개하자면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답이 되겠지만, 미안하게도 그 답은 무한루프라서 수렴하지 못한다. 있다는 가정이 아니라 없다는 가정에 날카로운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수학은 지독하나마 일상의 쓰임새가 출중한 청산가리 만큼이나 매력적인 학문이자 마약으로 알려진 코카인이나 히로뽕에 견줄 수 없는 엄청난 엑스터시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 얘기가 절대로 사실이 아님을 믿고 있는 수포자들에게는 상당히 머쓱할 수 있건만 섣부른 추측은 금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을 수 없겠지만 수학은 진정 아름답고 명료하며 또한 치명적이다. 페르시아 속담에 이르기를 '함부로 추측하지 말아라, 엉뚱하게 추측하면 느닷없이 이리에게 목덜미를 물릴 수 있으니 관찰하고 또 관찰하라'는 경구를 잊으면 곤란하다. 어이없는 추측이란 의미 없는 불행의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삶이 만들어 낸 최고의 발명품이라던 스티브 잡스는 평소 피카소와 튜링을 존경했다고 전한다. 특히 그에게 영감과 영향을 끼친 피카소의 한마디는 다음과 같다.

 "저속한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설마 하니 이 명언 때문이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젊은 시절 잡스는 복사기 제조회사 제록스의 발명품이자 입력 장치인 쥐새끼(마우스)의 알고리즘과 제조 기술을 오롯이 훔쳐와 애플 컴인 매킨토시에 심어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공전의 히트를 쳤고 그 덕분에 떼돈을 벌었다.  

  뿐만아니라, 고흐는 조르즈 쉬라의 점묘사 터치 기법을 영락없이 훔쳤고, 피카소는 물리학의 스팩트럼 장르를 서슴없이 훔쳐와 큐비즘의 표현의 수단으로 삼았다. 물론 후세에 들을 도적놈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르거니와, 천재인 앨런 튜링이 생존해 있다면 그의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사고방식으로 도무지 헛소리 같기만 한 파블로 피카소의 개(?)같은 명언을 함부로 해석할 수 없을 터이지만, 적어도 당신이라면 이 말의 숨은 뜻을 적절하게 그리고 매우 쉽게 해석하여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허튼소리에 골치 아픈 방정식을 세워 그것을 증명하려 애쓰거나 위험천만한 진리를 추구하려 하지 않는 이상 모순과 역설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럴 수 있는 당신이 지금 생존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것을 자백해야 한다.

  이건 허튼소리가 아니다. 정작 불행해본 기억이 없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생판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불행했던 기억이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음은 전혀 거짓이 아니다.

  살아생전 유대의 바리세파 교도들로 하여금 이단과 악마의 상징으로 오죽이나 험 핍박과 불행에 시달렸으면, 그저 평범하게 지나치는 일상(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있었을까? 혹여 그대가 지금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이미 행복의 씨앗을 심고 있음이 자명하다.


  행복한 죄책감이란 불행한 기억의 상보 논리이다. 빛이 입자인지 파동인지를 구분하는 문제에관찰자가 취하는 태도에 따라 빛은 입자가 되기도 하고 파동이 되기도 한다는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와 동일하게, 당사자가 취하는 태도에 따라 행복인지 불행인지의 결정과 구분이 가능하다. 그래서 행복과 불행은 항시 입자와 파동처럼 모호하게 두리뭉실 중첩되어 오기 마련이다.


  이 결말이 썩 후련하다면, 함부로 찍어 맛을 볼 수 없는 쌉쌀한 청산가리에 얽힌 마성(魔性)의 죽음에 견주어, 무미(無味) 생존의 기쁨을 누리고 있노라는 잠시의 행복이 있을 있다. 기어코 따지자면, 행복 불감증과 불행 공포증은 동질이자 말놀이에 불과하므로 시답잖은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여 번뇌를 자초할 필요는 전혀 없다.

청산가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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