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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경 Feb 04. 2023

도시라는 이름의 콘크리트 생태계

절대적이자 상대적인 생존에 대하여

  생태계의 정의는 동일한 장소에서 상호 군집으로 생애를 영위하되, 생명이 유지되는 동안 서로 의존하는 완전히 독립된 집단군 체계로 본다. 이 정의는 상호 의존성과 생존에 관한 순환의 무결성이 필연적이라는 뜻이다. 미생물과 동식물을 막론하고, 탄소 분자고리에 엮여 생명을 유지하는 유기체들은 생태계 먹이 사슬을 통해 소통하며 밀접하는 경우가 필요 불가결의 조건다.

  여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도덕이나 율법의 질서를 전적으로 무시하며, 본능 행위를 통하여 유기체들과 소통하며, 순환 과정에서 계내 전체의 총괄 에너지는 저항 없이 자연스럽게 유동한다. 이러한 에너지의 순환 사이클을 거듭하는 동안 다양한 생태계가 태동하고 파생하며  소멸되기도 한다.

  영역 다툼에서 밀려난 어미 표범과 젖먹이 새끼 표범은 수십 마리가 넘는 여우 집합군 있는 낯선 생태계로 이전해 다. 성체인 어미는 새끼와  생존 문제로 하여금 여우 집단군을 공격하며 사냥을 시작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수십 마리 여우 집단군 개체는 1/2축소되었다. 반년이 지날 무렵 여우 개체수는 거의 소멸 직전에 이르렀기에, 여우들은 특단의 대책이 필요 하였을지도 모른다. 어미가 사냥으로 자리를 비운틈에 아직 성채가 되지 아니한 힘없는 새끼 표범을 늙은 여우의 지휘로 수월하게 제압하여 그들 역시 새끼 표범을 생존의 수단인 먹이로 삼았다.

  동일한 먹이사슬의 공유 영역에서 포식자로부터 살아남는 최선의 방법은 영역을 포기하거나 상대를 제압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럴만한 역량이 없다면? 우선 잠재적 포식자를 제거하여 어미의 관심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것쯤은 여우들도 본능으로 알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혹여, 새끼를 잃은 어미 표범이 인간이라 어떠했을까? 빡친 표범은 눈이 뒤집혀, 여우 집단을 철천지 원수로 규정하고 씨를 말리는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다.  에헤... 그러나 섭리를 이해할리 없는 어미 표범은 이듬해에 또 다른 새끼를 잉태하였고, 줄어든 여우의 개체수도 점차 회복기에 이른다. 그들의 생태계는 자연스레 균형을 찾아 활발하게 현재도 진행형이다.

  

  생태계에서 비정함이나 잔인함이란 존재할 수 없다. 적어도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 획득 과정만큼은 더욱 적나라하다. 그 로 물고기는 물고기를 먹고, 곤충은 곤충을 먹으며 또한 짐승은 짐승을 먹는다. 개중에 초식을 하는 개체나 동물도 포함되어  있으니 무슨 쉰소리 비약이냐는 의심도 있겠지만, 유독 사람이 사람을 먹는 행위를 생태계 작동 원리에 대입시키는 작업은 지극히 금기사항이다.  이유란 알고 있다시피 인간계에서만 통하는 제법 알량한 도덕 질서와 성문화된 법률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의 차원에서 악을 배제한 살인의 저의를 다시금 파악해 보라! 실제 상황에서 방어기제로 작동되 정당방위의 살인 행위는 용인되어야 하는? 부당한 살인과 정당 살인이 경우나 상황에 따라 가능한가? 섬뜻 하지만 그 귀결이란 순전히 자의 논리이며, 극명하게는 사람도 사람을 먹어 치운다는 얘기가 된다.

  다만  대상이 인간과 맞바꿀 수 있는 교환 수단인 재화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표범이 재미나 장난으로 여우를 사냥하지 않듯 목적과 동기가 없는 살인이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가 믿고 있던 이성적(내지는 감성적) 판단이나 주관적(내지는 객관적) 식이란 지배자가 왜곡한 변질된 서열과(도그마) 다름없다. 선은 이미 위장된 선일 수 있고, 악 또한 선의 영역에 포괄된 악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무릇 인간들은 오직 법리라는 테두리의 한계가 분명한  생태계에서 맘껏 자유로울 수 다. 그대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란 과연 절대 자유인가? 상대 자유인가? 아니면 포박 자유의지 인가?


  인간의 입장에서 낚시질이란 고상한 취미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되, 미끼에 낚이는 고기 입장이라면 목숨을 담보하여 먹이를 선택해야 하므로 생사의 기로가 결정되는 치사한 사기행각에 불과하다. 이는 살상의 목적에서 총질을 취미로 하는 사냥도 다를 바 없다. 어느 생태계가 되었건 취미라는 장난질로 살상을 일삼는 괴이한 종은 인간 이외에 없다.

  그래서 유희나 장난질이 목적이 아니라면? 적어도 당신이 포획한 생명체는 정중히 예를 갖추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섭취함이 타당하다. 그것이 도덕률에 기대어 생태계를 살아가는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올바른 자세라면 허튼소리 일까? 

  하기사 도덕률은 물론이고 준칙과 신뢰마저 죄다 뭉개서로를 향하여 살육의 총질로 전쟁놀이를 벌이는 개체 또한 유일하게 인간뿐이다. 가축인 소나 돼지의 입장은 차치 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먹어야만 생존이 가능한 생태계 하위 식자입장에서 보자면, 인간만큼 괴상하고 싸늘하며 교활포식자는 어디에도 없다.

  공포스럽지만 인간의 천적은 유일하게도 인간 뿐이다. 도시라는 이름의 달콤 살벌한 콘크리트 생태계 속에서 당신은 도대체 누구의 포식자인가? 아니면 누군지의 피식자인가?


  오냐! 나 역시 동물 사체 허기를 채워가며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조달하생태계 최상위 포식자가 맞다. 그래서 도대체 어쩌라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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