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for+give)나 이해(under+stand)는 계급이 만들어낸 도그마(질서)로 보는 경향이 많다. 어원을 살피자면, 용서란 인간이인간위에 있을 경우에 해당하고, 이해란 인간이 인간아래에 있을 경우에 해당하는 용어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음직한 그럴싸한 해석이다.
그러나 나의 견해는 다르다. 용서란 내 안의 다른 나와의 타협이고, 이해는 내 밖의 나와 상대하는타인을향한 배려라고 보기 때문이다. 희한한 일이지만, 법치국가의 제도권하에서는 이해와 용서를 구분하지 않는다. 법은 상호 평등을 추구하는 동등한천칭인 이큐브리움(Ecubrium)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뱀을 용서하거나 이해하기에는 채 1초가 걸리지 않고, 이와 모양새가 비슷한 지렁이는2초가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전자는 물릴까 두려워 피하거나 잡아 죽이는 설정의 시간이고, 후자는 징그러워 외면하거나 살려줘야 한다는 측은지심을 설정하는 시간이라고 봄이 타당하다.인간이 인간을 용서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어떨까? 이 분야 인류학자들의 견해를 참조하면 개략 1,000 일이(약 3년 내외) 소요된다고 한다.거짓말을 할 수 없는 뱀이나 지렁이와 인간을함부로견줄 수 없기 때문이다.
완전하게 지우지 아니한 용서란 마치 사금파리를 품고 있는 것과 진배가 없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간들 사금파리의예리함은 무뎌지지 않는다. 사람의 망각이란 흘러가는 물처럼 유유 커니와, 염두에 대차게각인된용서라는 함의(含意)의 기억이란 한편으로는비참한 것이다.
아픈 기억이라는 나름의 허튼 증빙으로 하여금 야릇한 불행의 단초를 엮어내지 말 것이며, 채권이나 현금이 아닌 다음에야보관하지 말고 말끔히 삭제하여 용서해야 한다. 물리적으로 기억 세포만을 골라서파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용서해야할기억의 사슬과 별도의 결별을계획해도 무방하다. 하찮은 용서나시답잖은 기억과의결별보다 놀라운 것은 생존이라는 점이다. 살아있음은 극히 평범커니와다른 한편으로는 기적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해건 용서건 살아있는 순간에만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삶이 기적이건 말건 가보지 아니한 길이라면, 이승길이건 저승길이건 누구라도 낯선 초행길인 법이다. 살다 보면 탄탄하고평평한 궤적을 달리는 철마처럼 수월한 길도 있고,답답하게 꽉 막힌 막다른 길목도 있는법. 기찻길옆 막다른 골목 어디쯤에 봉착하여내 안의 나를 용서해야 하거나 누군지 타인을 이해 해야만 하는 일이 반드시 생길 수 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라는 것은 성자의 가르침이자 성자의 몫이다. 단 한번의 이해와 용서는 우리의 몫임을 기억해야 한다.
혹여, 당신이 누군지를 용서할 경우가 있거든 상대의 행위에 관한 모든 것을기억에서 죄다삭제해야 한다. 만약 그것들을 지우지 않고 뚜껑을 덮어 두었다면,참혹한 인내에 불과할 뿐절대로 용서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