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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빛창가 Oct 27. 2022

그리니치 천문대

소설연재

마크와 헤어진 지 한 달이 지났다. 이제 계절은 가을을 지나 겨울로 향하고 있었다. 그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는 아마도 나와 제니를 분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그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퇴근길에 한강을 건너며 창밖을 보니 오늘따라 노을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따뜻하던 그의 품이 더욱 그리워졌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채 무작정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어둑해져 가는 강가를 걸으며 그를 생각했다. 그리고 한 번도 보지 못한 나의 언니 제니를 떠올렸다.  

   

‘어떤 사람이었을까? 제니는...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린 이대로 끝인 걸까...’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강가에서 폭죽을 터뜨렸다. 강물에 비친 불꽃들이 몽환적으로 보였다. 난 멍하니 바라보았다. 강물이 일렁이며 흘러가자 물에 비친 불꽃은 순식간에 마크의 얼굴로 이어서 사진 속 제니의 얼굴로 바뀌었다.


그 순간이었다! 문득 마크를 처음 만나던 날 꿈에 나왔던 그 여자가 혹시 제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 만난 그 여자는 낯설었지만 두려운 마음보다는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어릴 적 꿈에 나온 그 여자애도 낯설지 않았다. 그 아이는 어릴 적 제니였을까? 어쩌면 제니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보낸 건 아닐까? 그녀는 자꾸만 나를 어딘가로 이끄는 느낌이 들었다. 쌍둥이는 그들만의 텔레파시가 있다고 하던데... 그 느낌을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뭔가가 느껴졌다.


불현듯 제니의 엄마를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있으면 크리스마스라 연차를 내면 빠듯하지만 영국을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곧바로 제니의 엄마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전했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엄마에게 바로 답장이 왔다. 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나와의 만남을 손꼽아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녀를 만나면 뭔가 답을 찾을 수 있겠지...     


12월 23일, 난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와 여름휴가를 보낸 후 두 번째 영국행이었다. 제니의 양어머니는 런던 근교인 그리니치에 살고 있었다. 클래식한 멋이 있는 빨간 벽돌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은발의 자그마한 중년의 여인이 나왔다. 그녀는 날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며 입을 틀어막았다.  

   

“God... you really looks like her. Daring... Happy to meet you”

“It's good to see you mom”     


난 그녀를 엄마라고 불러주었다. 내 언니의 엄마니까 나의 엄마이기도 하다. 제니의 엄마는 나에게 따뜻한 영국식 식사를 대접해 주었다. 오븐에 구운 닭요리에 디저트로는 상큼한 레몬 케이크를 내어왔다. 비록 음식의 종류는 달랐지만 그녀의 정성이 담긴 식사에서 엄마의 정이 느껴졌다. 제니도 자라면서 이 음식들을 먹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식사 후 제니의 어릴 때 사진을 보여주며 그녀가 어떤 아이였는지, 얼마나 자신을 기쁘게 해 주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녀의 사랑과 그리움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제니의 양아버지는 제니를 잃은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2년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가족을 두 명이나 잃고 혼자 살아가는 그녀가 너무 안쓰러웠다. 온 마음을 다해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녀는 내 품에서 오열했다. 그 상실감을 감히 짐작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이 지구상에 나와 같은 얼굴의 사람이 살고 있었었는데 난 지금까지 까마득히 몰랐다니 모든 상황들이 원망스러웠다. 단 한 시간만 아니 단 일분만이라도 제니를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허락을 구하고 싶었다. 그녀가 사랑했던 그 사람을 내가 사랑하면 안 되냐고... 제발 그를 고통에서 구해달라고...


제니의 어머니는 마크를 잘 알고 있었다. 난 모든 상황을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그녀에게 쏟아냈다. 그녀는 담담하게 내 손을 잡고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If Jenny were still alive, I think she would have said to you like this...

Hey, you fool! take this guy, he's yours now”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용기가 생겼다. 제니는 분명 나와 마크의 행복을 빌고 있을 것이다. 나의 언니 제니는 그런 향을 지닌 사람이었다. 다음날 제니의 엄마는 나를 데리고 제니가 다녔던 학교, 마켓, 쇼핑몰 등을 데리고 가주었다.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니 그녀가 더욱 보고 싶어졌다.


‘조금만 더 일찍 언니의 존재를 알았다면 우리는 팔짱을 끼고 깔깔거리며 쇼핑을 하러 다녔겠지...

그리고 쇼핑 후 피곤한 몸을 쉬기 위해 카페에 가서 맛있는 케이크와 홍차를 먹으며 신나게 수다를 떨었을 거야... ’  


누구의 잘못 때문이든 빼앗긴 시간들을 떠올리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 낳아준 엄마는 우리 자매를 버릴 때 이런 생각은 못했던 걸까? 이렇게 비극적인 상황이 될 수 도 있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녀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마지막으로 제니가 묻혀있는 곳으로 향했다. 무슨 꽃을 좋아할지 몰라 내가 좋아하는 노란 장미를 한 아름 사들고 그녀를 보러 갔다. 첫 만남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펐다.     


  Here lies the jenny parker who were beautiful woman.     


제니의 묘비명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제니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좋은 양부모님이 계셨지만 나와는 달리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알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정말 외로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쌍둥이 동생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 나보다 더 긴 세월 나를 그리워했겠지... 쓸쓸하게 죽어간 그녀가 너무도 가여워 눈물이 흘렀다.


“Goodbye... Jenny...”


그녀의 묘비에 입을 맞추고 돌아섰다.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맘이 평온해졌다. 그리고 마크와 함께 갔던 그리니치 천문대를 다시 가고 싶어졌다. 제니의 엄마와 인사를 나누고 천문대로 향했다. 그곳은 여전히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단지, 계절이 바뀌어 광장에 있던 푸른 잔디는 이제 사라지고 황량한 벌판만 남아있었다. 


그와 걸었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결국 본초 자오선 앞에 섰다. 시간의 시작점 앞에서 그와 약속했던 일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혼자 이곳에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한동안 그곳에 멍하니 서있었다.      


‘영원히 함께 기억하자고 했는데...그는 어디간 걸까?’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마크가 너무나 그리웠다.


그때였다. 누군가 말을 건넸다.     


“Excuse me... What time is it now?”


낯선 이에게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보여주기는 싫어 돌아보지도 않고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It's a 2:59 pm ”


“December 24th in the minute before 3 p.m... you are with me. I will remember this moment because of you.”     


난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그곳에 마크가 웃으며 서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시간의 시작점에서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만났다. 


“믿을 수 없어... 당신이 여기에 있다니... 도대체 어떻게?”

“결국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만나게 되어 있는 건가 봐. 바로 우리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서로 달려가 키스했다. 그동안 얼마나 서로를 강렬히 원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의 숨결을 느끼며 그의 향기를 맡으니 죽어있었던 온몸의 모든 감각들이 다시 깨어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은 안정감이 느껴졌다.    

  

가슴 뛰는 재회 기억을 뒤로한 채 우리는 노팅힐에 있는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벽난로 앞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우리의 특별한 날을 자축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 입술에 뭍은 샴페인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내 귀에 속삭였다.   

 

“I can't stand it anymore ”

“what?”     


놀라서 동그랗게 커진 내 눈을 보자 그는 웃으며 나를 안고 침실로 향했다. 그제야 그의 말 뜻을 이해했다. 너무 떨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나를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내 눈에... 뺨에..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목에 가슴에 그리고 등에... 나는 그의 손길과 입술의 감촉과 향기에 취해 눈을 감고 말았다. 그는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때로는 강렬하게 나를 조율했다. 우리는 서로를 간절히 원했던 만큼 열정적이고 아름답게 사랑을 나누었다. 


다음날 아침 침대에서 마크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현수, 혹시 이 사진 기억나?”     


사진 속에는 한 호숫가에서 10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그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가 손을 꼭 잡고 서 있었다.     


“어? 마크가 어떻게 이 사진을 가지고 있어요? 잃어버렸는지 알고 한참 찾았었는데”    

“며칠 전 네가 빌려준 책을 넘겨보다가 거기서 이사진을 발견했어. 바빠서 그동안 읽지 못했거든...”

“아~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말이죠? 거기에 끼워져 있었구나...”

“혹시 그 사진 속 남자아이를 기억해?”

“당연하죠... 7살 때였는데 다른 기억은 몰라도 저 아이만큼은 생생히 기억해요... 진짜 왕자님 같았는데...”     

그는 웃으며 서랍에서 또 다른 사진을 꺼내어 나란히 보여주었다. 똑같은 사진이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예요? 같은 사진이...”

“나였어. 그 남자아이... 어머니가 그날 폴라로이드 사진을 두장 찍어주셨지. 하나는 타임캡슐에 넣고 하나는 너에게 주셨어... 그 호숫가는 내가 타임캡슐을 묻어두었던 그곳이야...”     


난 너무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나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해. 넌 단발머리에 귀여운 아이였지... 나를 왕자님이라고 부르며... 쫓아다녔어...

그땐 내가 한국말이 서툴러서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었는데... 어머니가 중간에서 통역을 해주셨어.

나중에 꼭 우리 둘이 결혼하자고 했었데... 그때 너 혹시 나한테 무슨 마법의 주문을 걸었던 거 아냐? 하하”    

 

믿을 수 없었다. 그 소년이 마크였다니... 그래서였던 걸까?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낯설지 않고 편했던 이유가....

     

“니가 이 사진 속 여자아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난 깨달았어... 너와 나는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걸... 제니와 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란 걸.... 그 사실을 깨닫고 너에게 연락을 했지만 네가 어딨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어. 지수에게 물어보니 네가 영국으로 갔다고 하더라... 널 꼭 놓치지 말라고 했어... 난 무작정 영국으로 향했어... 그리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천문대로 가게 된 거야... 그런데 우연히 그 시간 그곳에 네가 있었지.”

     

“너무 신기해요. 정말 운명이란 게 있는 걸까요? 그 호숫가에서 당신을 처음 만난 뒤 20년 동안 나는 한국, 당신은 영국에서 살면서 서로의 존재조차 잠시 잊고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그는 대답 대신 웃으며 내 얼굴을 쓰다듬고 한참 동안 날 바라보다 이야기했다. 


“너에겐... 세상에 어떤 좋은 향수와도 비교할 수 없는 향기가 나.... 너의 향기만이 나를 미치게 해... 니 옆에 있으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내 모든 감각들이 완전히 마비되는 것 같아. 모든 생각이 정지가 돼...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쓸모 없어지는 느낌이야... 난 남들이 볼 때 화려한 세계에 속해있었지만 공허하고 너무 외로웠어... 그리고 우리 가정을 깨뜨린 아버지가 죽도록 미웠어... 믿지 못하겠지만 난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 보통의 가족들처럼. 그때 제니를 만났지. 하지만 제니는...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이었어. 난 오히려 그녀의 맘을 채워주면서 기쁨을 얻었지... 제니와 얼굴은 똑같지만 넌 그녀와 전혀 달라... 넌 아무도 몰랐던 나의 슬픔과 외로움을 알아봐 주었어... 그런 사람은 니가 처음이었어. 내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주고 위로해주었지. 그래서 오직 니 앞에서만 꾸미지 않는 완전한 나로 돌아갈 수 있었어...”


날 바라보는 갑자기 그의 눈의 반짝였다. 그리고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는 숨을 깊게 몰아쉬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넌 모든 걸 다 감싸주는 바다 같은 향을 가진 사람이야. 난 영원히 그 향기에 취해서  살고 싶어.

I deeply Love you... You are the one... 지현수! Will you marry me?”  


예상치 못한 그의 청혼에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망설임은 전혀 없었다.   

  

“Yes! 마크! Yes!!  난 언제나 그랬어요...!!”     


마크는 활짝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우린 서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키스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따뜻한 기운이 우리를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제니도 우리의 결혼을 기뻐하며 함께 축하해주는 것 같았다.


‘고마워 제니.. 나의 언니... ’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만나게 되어있는 걸까. 그렇게 긴 시간을 돌고 돌아 우리는 운명의 상대를 다시 만났다. 그의 가슴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그의 향기가 내 온몸에, 조금씩 스며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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