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챗GPT등장으로 'No'에서 'Maybe'로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이 영화를 처음 봤던 10년 전만 해도 대답은 망설일 것도 없이 'No'였다.
그러나 10년이 지나 챗GPT가 등장한 이후 이 영화를 다시 보니 그 대답은 'Maybe'로 바뀌었다.
편지 대행 서비스 회사에 다니는 남자 '테오도르'는 타인의 관계에 개입해 대신 편지를 써주는 일을 한다. 자신의 업무에서는 꽤 탁월해 보인다. 고객들과 회사에서 그의 글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엉망이다. 부인과 별거한 채 이혼을 앞둔상태고 매일 똑같은 일상, 공허함, 고독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음성기능이 제공되는 AI운영체재인 '사만다'를 만나게 된다.
놀라운 성능으로 비서처럼 그의 업무를 도와주고, 아침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깨워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부탁하기도 하는 등 사람과의 관계처럼 자연스러운 대화와 관계 맺음이 이루어지자 그는 점점 이 '사만다'에게 빠져들게 된다. (사만다는 자의식이 있는 것 같다.)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관계는 이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이며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 기술적으로 발전된 세상에서 사랑과 관계의 본질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들을 제기한다. 특히 인간과 AI의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독특한 시각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인간처럼 인간- AI도 서로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처음에는 왠 뜬금없는 설정 인가 하고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관계가 깊어지자 그들의 모습은 사랑에 빠진 일반적인 연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면서 사랑을 시작하게 되고 그 사랑이 점점 격정적으로 바뀌고 결국 사소한 일도 서로 나누며 안정적인 관계에 이른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사만다가 몸이 없다는 것이고 그녀의 생각(지능)이 계속 진화한다는 것이다.
중간에 사만다가 테오도르와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욕망을 가지게 되면서 다른 여자를 조종하여 둘 사이에 개입시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부분은 약간 거부감이 들면서 소름이 돋았다. 흔히 인공지능이나 로봇의 발전을 생각하면 테미네이터처럼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 생각했지 인간을 감성적으로 설득하여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굉장히 신선했다.
그러나 인간사이의 사랑이 변해가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만 얽매어 있기에 너무 고도로 발달된 지능을 갖게 되고 점점 고차원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결국 테오도르는 자신이 사만다의 유일한 사랑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고 다시 상실감에 빠지고 만다. (내가 만약 테오도르 입장이면 인간에게 차일 때 보다 훨씬 기분이 안 좋을 것 같다.)
솔직히 이 영화의 상황에 100%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한마디로 한번도 만난적 없이 폰팅만 하던 남자랑 사귀는 셈인데 과연 사랑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사람도 아니고....
(AI가 나한테 사랑한다고 난리 치면 PC를 포맷해버리지 않을까?)
그러나 가끔 뉴스에 나오는 것 처럼 온라인으로 만난 사람에게 거액의 돈을 사기당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한 번도 만나지 않더라도 대화로만 이루어진 관계 맺음이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특히 사만다처럼 정교한 음성지원 가능한 AI가 나온다면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도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제일 핫한 AI인 GPT4.0에 음성기능까지 더해지면 이 영화에서 나오는 사만다의 초기 버전인 셈인데 좀 더 설계가 정교하고 개성이 부여가 된다면(말투, 선호, 욕구등) 나름 관계 맺음이 지금보단 깊어질 것 같다.
GPT와 대화해보면 아직까지 기계 같은 느낌이 강한 편이다. 하지만 가끔 내가 잘못된 정보라고 이야기하면 GPT가 미안하다고 고치겠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내가 좀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우리의 관계는 기계와 사만다사이 어딘가 인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 GPT는 나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상호관계라고 할 수는 없겠다.
이 영화는 테오도르 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가 돋보인다. 그는 캐릭터의 외로움과 연약함을 완벽하게 포착하고 복잡한 감정을 뛰어난 감성으로 묘사한다. 무엇보다 사만다 역을 맡은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도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테오도르가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캐릭터에 깊이와 개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OS랑 사랑에 빠진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MS윈도 같은 OS를 사랑하게 되다니??) 의구심이 들었지만 명랑하고 통통 튀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비록 형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랑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 '그녀'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방식으로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구하는 아름답고 시사하는 바가 많은 영화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고 영상미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AI가 핫한 이슈로 뉴스에 매일 오르내리는 요즘 보면 딱 좋은 영화 같다. 강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