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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섭 Jul 31. 2023

스무고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지적 호기심

인체를 소우주라고 한다.  그만큼  기계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함을 지니기도 하지만, 우주 즉 자연의  원리를  그대로 따른다는 의미도 함축한다.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인지는  문명이 발달할수록 좀 더 과학적이며 객관성을 향해 나아가는 상황이다.

망원경이나  현미경의 등장으로 더 좋은 관찰 수단이 생겼지만  지적인 호기심이 없다면 단순한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릴 적  스무고개라고  궁금한 것을 묻고  거기에 따른 답에  다시 질문하는 궁금증을 파고드는 놀이 겸  지적호기심의 교류방법이었다.   


지금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바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바로 답이 나오는 지극히 편리한 세상이지만  

역시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되는 그 이치에는 벗어날 수 없다.


밥을 지을 때  뜸을 들이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문제를 고민하고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기를 하면서

사고의 영역과 간절함의 확대라는  과정이 점차 옅어져 가고 있는 듯하다.


고민의 부재는 왜?라는 합리성을 망각해 버리고  누군가 제시하는 정답에 맹목적인 추종을 하기 쉽다.

인체의 건강에 대해서도 같은 결과를 짓는데  무엇보다 소중한 나 자신의  안위에 위협이 될 소지가 매우 크다.


가령 관절 건강에 대해 예를 들어 보자.


`연골은 재생이 되지 않는다`라고  많은 의사들은 얘기한다.  그러면 이런 오류가 생긴다.

아기들 연골 지름이 3cm이고 어른은 10cm이라면  재생이 되지 않고서는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 것인가?


환자가 의사에게 `연골은 재생이 되지 않나요? 물으면 대개`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연골세포는 죽을 때까지 그대로라면  신경세포처럼  수명이 그렇게 긴가요?라고 물어봐야 한다.  


기계처럼 재생이 안 된다면 많이 쓸수록 빨리 닳을 텐데... 왜  마라토너나  역도선수들은  수십 년을 무리하는데도 연골의 손상이 없을 뿐 아니라 되려 동년배보다 훨씬 건강한 무릎을 갖는다.


말이나 기린은 평생을 거의 서서 생활하는데  연골이 짓눌러지거나 파열되지 않을까?  달리게 되면 수십 배의 충격을 관절이 받는데 어떻게 멀쩡할까?  


연골이 닳거나 파열되어 수술이나 시술하는 사람들이 이런 혹사하는 환경과  거리가 먼 것을 보면  전문가들이 상식처럼 언급하는 내용과 너무나 배치되는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연골은 재생이 되며  재생의 조건은 충격과 압력을 받아야 더 재생이 용이하게 이뤄지며, 만약 운동부족 등 압력이 주어지지 않으면 연골세포가 숨을 쉴 수 없어 괴사하는 합리적인 이유와 일치한다. 


따라서  생각하는 동물이 인간으로 명제될 만큼이니  모든 부분에서 한 번쯤은 왜?라는 합리적 의심을 해볼 일이다.


콩나물 하나를 사드라도 값이며 생육환경 품질등 꼼꼼히 살펴 사는데  하물며 금쪽같은 우리 몸에  관련된 선택을 주관 없이  무턱대고 남에게 맡겨서야 되겠는가?


비록 잘못된 선택을 할지라도 나의 의도로 인한 것이라면  후회를 할지언정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나  만약 타의에 의해  결정되어 잘못된 결과로 이어졌다면  얼마나 답답할 것이겠는가? 


일상사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개인의 건강에 있어서도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  사항들이 발생한다.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한다라는  과거 광고내용처럼  선택에 따른 그 결과는 천양지차일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알려진 내용에  한 번쯤은 갸우뚱해 보는 하루가 돼 보자.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지적 호기심은  만고의 진리로 여겨졌던 프톨레마이어스의 천동설을 깨치는 동기가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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