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하지 못한 믿음은 자신을 더욱 오염시킨다.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나 두 부처나 셋, 넷, 다섯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부처님께 모든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말을 듣고 한순간이라도 깨끗한 믿음을 내는 사람이니라
어느 시대이든지 해탈한 대선사를 보면 마치 전생에는 무엇을 하고 살았든지 금생에 화두 하나를 붙잡고서 잘 참구 하여 성불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우리가 그런 분들의 전생의 삶을 못 보아서 그런 것일 뿐이다.
그러나 실은 이런 존재는 그 여러 전생에 걸쳐 부처님께 잘 공양하고 올바른 믿음을 잘 유지하고 계를 잘 지키고 복을 잘 닦고 고행인욕을 잘 한 분들이다. 예외가 없다.
그러면서 성불하기 이전에 수많은 불보살들과 친해지고 그분들의 가피를 받으며 무사히 금생에 각(覺)을 이루는 것이다.
왜 그런가?
견성(見性)이든 해탈이든 깨달음이든 다 같은 내용인데, 이렇게 되기 전에 수많은 무시무시한 마장(魔障)들이 몰려온다. 그래서 도고마성(道高魔盛)이라고 옛 분들이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아직 성불 전이라, 개체가 우주적인 큰 마장들을 이겨내고 극복할 수 없다.
이때 불보살님들이 그런 마장을 물리쳐주기도 하고 극복할 힘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불보살님들에 대한 선근(善根, 자기 존재의 뿌리를 부처님으로 삼게 되는 것)이 깊어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불이 위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앞에서는 바른 믿음(正信)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깨끗한 믿음(淨信)이라고 또 표현하신다.
바른 믿음은 잘못된 믿음에 대한 반대이고 깨끗한 믿음은 더러운 믿음 또는 지저분한 믿음에 대한 상대적 표현이다.
바른 믿음은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 출발하고 깨끗한 믿음은 나 자신이라는 존재에서 출발한다. 물론 종착지는 같지만 출발역은 다른 것이다.
무엇이 깨끗한 믿음인가?
바로 공심(空心), 즉 텅 빈 마음에서 나오는 믿음을 일컫는다.
즉, 진리와 부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 자신을 들이밀지 않는 것이다. 다시 풀어 이야기하면 나의 소원, 나의 바람 등 일체의 중생심을 뒤로 젖힌 상태에서 나오는 믿음이다.
소원이 이루어지면 부처님을 믿고 그렇지 않으면 불신하고 하는 등 색(色)에 매여있는 의식으로 가지는 믿음은 왜 지저분하고 더러운가?
부처님과 진리를 색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이고, 그것도 자기 욕망을 기준으로 부처님과 진리를 따지고 평가하니 오염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런다고 부처님과 진리가 오염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의 영혼이 오염될 뿐이다. 깨끗하지 못한 믿음은 자기를 더욱 오염시킬 뿐이라서 깨끗한 믿음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럼 맹신이나 광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어떤 종교의 믿음은 맹신이나 광신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래서 청정한 생각을 하도록 일깨워주지 못하고 무조건 믿도록 세뇌시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오류가 내포되어 있다. 맹신과 광신은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와 더불어 그 종교도 사라지게 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후오백세에는 그 종교가 고대 전설적인 한 역사기록으로 남는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이 자성불을 찾고자 명상하고 있다.
지금 수행자들이 부처님전에 겸손하게 선근을 심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가 부처라고 수행하면서 또 잘난 체를 하고 있으니 이는 석가모니불의 말씀에 따르면 지계(持戒)와 수복(修福)이 모자란 탓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다. 불교 또한 지금 자기 자신에 대한 맹신과 광신이 휩쓸어 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