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 선근을 심은 사람은 한량없는 복덕을 받는다.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렇게 한량없는 복덕을 얻느니라
여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보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평소 이런 사실을 잊어버리고 생각하고 행동하니 부처님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여겨지지만 이것을 알고 있으면 과연 어떨까?
그러면 여래는 빅 브라더(Big Brother)인가?
빅 브라더와 여래는 우리들을 모두 보고 알고 있다는 것은 공통점이다.
그러나 빅 브라더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알고 마음속으로 행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 여래는 모든 생명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까지 실제 모두 알고 보고 계신다.
또한 빅 브라더는 그런 정보를 통해서 우리들을 통제하고 자기의 권력욕을 충족하고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여래는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우리 모두 내면에 불성을 가지고 있고 영혼이 있고 이들 가운데 원하는 것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자유와 부자유 모두 갖추어져 있다. 다만, 어느 것을 끄집어내어 살 것인지는 자기 자신이 자유롭게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기도하고 절하는 것은 아직 어리석어서 법의 구속을 받아 부자유롭고 고통스러우니 제발 나에게 간섭해 주어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는 요청이다.
이것이 실상인데, 일부 종교 등에서 신(神)이 모든 것에 일일이 간섭하여 시험하고 시련을 주고 복을 주고 하는 것들이 실상인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다. 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종교는 신이 간섭하고, 용서해 주는 이야기를 하는데 신은 이런 일을 실제 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이 지구상에서 아무도 살 수 없을 것이다. 배우자가 잔소리 가끔 하는 것도 힘들어하는데, 신이 시시콜콜 간섭하여 귀찮게 한다고 상상해 보라. 신이 곧 악마로 느껴질 것이다.
지계(持戒)와 수복(修福)을 통해 부처님께 선근을 심은 사람은 바른 믿음을 낼 수 있고 이런 사람은 한량없는 복덕을 받는 것을 모두 보고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이면 복이지, 왜 덕(德)을 같이 붙여 항상 복덕이라고 하는가?
복은 덕이 함께 구비되어야 온전한 복이 될 수 있고 덕은 복이 함께 구비되어야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덕이 없는 복은 양날의 칼이요, 복이 없는 덕은 흙 속의 진주라.
그러므로 둘은 서로를 완전하게 완성시키기 위해서 수레의 두 바퀴 같은 것이다.
복은 선행으로 쌓여가고 덕은 고행인욕으로 이루어진다.
복과 덕을 같이 구비하려면 선행과 고행인욕을 함께 닦아야 함은 물론이다. 계를 지키고 복을 닦고 선근을 심는 것은 모두 선행이면서 동시에 고행인욕이 아닌가?
여래는 복덕이 우주와 같이 되어있는 양족존(兩足尊)이다.
무량한 복덕을 얻는다(得)고 했다.
얻는다는 뜻은 누가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주고받는다면 나와 상대가 있다는 것이므로 당연히 존재의 분별에서 나오는 한계가 있게 되고 따라서 무량할 수가 없는 법이다.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인데, 인과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복덕이 무량(無量)하려면 먼저 나 자신이 무변(無邊)한 존재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금강경을 잘 믿고 수지독송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계를 잘 지니고 복을 닦으며 선근을 심어야 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나 자신이 무변신(無邊身)이 되어 자연히 무량한 복덕이 구비되는 것이다.
법의 작용이 근본이고 여기에 덧붙여 부처님을 비롯한 타 존재가 복을 주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복을 짓지 않은 사람도 기도를 잘하면 복을 얻는 것인데, 이때 바로 부처님의 대자대비가 작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