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한 복덕을 가진 사람은 진리와 일체화가 된 사람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 모든 중생들은 다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고 법이라는 상도 없으며 아니라는 상도 또한 없느니라
무량한 복덕을 얻는 사람이 그 이유를 보니 사상(四相)이 없고 더불어 법(法)에 대한 상(相)도 없는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신다.
상을 가지고 사는 우리 중생이 어떻게 상이 없는 존재로서 무량한 복덕을 얻을 수 있을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충분히 들 수 있다.
그런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마음자리를 얼마든지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악마의 자리부터 부처의 자리까지, 지옥의 자리부터 극락의 자리까지 얼마든지 옮길 수 있는 이유는 내 안에 모든 것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단 하나, 자기가 태어나서 가지고 나온 것과 살아가면서 형성된 마음자리를 스스로 고정시키고 있는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고정불변의 것은 없다고 알고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마음만은 어떻게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천하의 악인이라도 잠깐동안 선한 마음을 낼 수 있고, 천하의 선인이라도 잠깐동안 악한 마음을 낼 수 있다.
이때 잠깐 나온 선을 잘 단단히 붙잡아 거기에 자기 마음자리를 계속 놓으면 점차로 성인(聖人)이 되어가고 나아가 훈습(薰習)되어가면서 결국 상으로부터 떠나게 된다.
선악을 분별하지 않고 떠나 중도로 가라고 대선사들이 가르치니 마치 선한 것도 하지 않고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큰 착오이다.
악한 사람은 영원히 선악의 분별을 떠나 중도를 갈 수 없다. 업장이 길을 가로막기 때문에 길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절벽이 평지로 보이기 때문에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된다.
먼저 지극히 선한 사람이 되어야 그 선업의 힘으로 선악을 떠나 중도를 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석가모니불께서 처음에 윤리도덕을 가르치신 것이다. 불도를 가는 상근기자(上根機者)는 지극히 선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상(四相)이 마침내 없고 나아가 법상(法相)도 없고 비법상(非法相)도 없다고 하신다.
진리가 이렇니 저렇니 생각하는 사람이 곧 법상을 가진 사람인데, 법상은 아상을 비롯한 상을 가지고 진리에 대해 따지고 나아가 고정관념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비법상이란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법상이 없다고 진리가 없고 여래가 없고 아무것도 없는 허무가 아니다. 진리 자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자기 나름의 생각이 없음을 말한다. 즉, 알음알이 가지고 진리를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법상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법이 공하다고 억지로 표현하는데, 법이 공하다고 하니 단멸상(斷滅相)을 가진다.
아예 말을 말아야지..
왜 그런가?
진리가 이미 체득되고 자기 불성과 계합(契合)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나 역시 진리가 이렇고 저렇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냥 진리를 있는 그대로 말하고 싶으면 말하고, 말 안 하고 싶으면 안 하는 사람이다.
내 생각을 가지고 법문을 하면 일 년 내내 매주 와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올 때마다 전혀 다른 내용의 다른 차원을 설법할 수가 없다. 내 머리는 평범하기 때문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늘 부분적이고 단편적이기 때문에 항상 진리와 어긋나거나 부분적인 진리일 뿐이다.
그러면 생각은 필요 없는가?
아니다. 진리와 함께 하면서 어떻게 하면 진리를 잘 전달하고 방편을 잘 활용할 수 있을까 연구하는 데 사용하면 두뇌는 좋은 도구가 된다.
무량한 복덕을 얻는 사람은 법상이든 비법상이든 진리를 자기의 잔머리로 이리저리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일체화가 되어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법상과 비법상을 가지게 되면 진리와 실제로 멀어지고 등지게 되며 금생의 수행은 끝났고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린다.
법상과 비법상이 없이 길을 잘 가는 사람이 참으로 희유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