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이 복을 누리면 자기 본래면목을 찾는 일에 게을리할 수 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많은 목숨으로 보시했을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타인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이 저 복보다 매우 많으니라
모든 중생의 가장 소중한 생명을 보시한다는 것은 살아서 성불하는 것조차 포기하는 마음일진대, 그런 목숨을 수없이 보시해서 거의 무한한 복을 쌓아도 어찌 이 경을 받아 지니는 것보다 못한 복이 되는가?
그렇게 해서 상상도 못 할 큰 복들을 생(生)을 거듭해서 받아 하나의 고통도 없이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길래 그러는가?
그럼 오래 건강하게 살고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부자는 영원히 성불할 수 없는 것인가?
문제는 복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복(福)과 고(苦)를 대하는 마음에 있는 것이다.
복을 복으로 여기지 않고, 고를 고로 여기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사구게를 받아 지니고 타인을 위해 설법하여 얻는 복과 목숨을 보시해서 얻는 복은 근본적으로 사실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런데 여래께서 이런 복의 차이를 말씀하시는 것은 아직 우리가 중생인고로 혹시 물질적인 복에 집착해서 돈을 버는데 재미를 붙여 평생을 바치거나 (복을 찾아 먹으려면 더욱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것을 누리느라고 자기 마음을 소홀히 하거나 자기 본래면목을 찾는 일을 게을리할까 봐 염려하셔서 그런 것이다.
또한 중생은 습성(習性)이 형성되기 때문에 한 번 복을 누리는 즐거움에 빠지면 관성이 붙어 좀처럼 돌이키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현실의 걱정거리가 별로 없으면서 자기 부처를 찾는데 열중한다면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고행인욕(苦行忍辱)이 좀 모자라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돈이 많은 부자가 자기의 자존심과 과시욕과 소비욕구를 열심히 자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자원봉사를 열심히 한다면 이것 또한 고행인욕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