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째 결혼기념일을 맞기 2주 전 생명의 존재를 확인하다
그 달은 이상하게도 아무런 부담감도 기대감도 없었던 달이었다. 무거운 것들은 단 하나도 내 마음에 담겨있지 않았고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마음에 아무것도 없이 생각도 없이 가벼워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우린 그 당시 계획 임신을 꿈꿨으나 계획되고 되진 않았고 고대하고 간절했기에 난임 병원에 다니고 있었다. 진료예약을 해두었던 날이 되었고 그 전엔 병원 가기 위해 부지런도 떨고 기대에 차서 몸을 움직였지만, 오늘은 가기 싫었다. 그냥 싫었다. 쓸데없는 고집처럼 가기가 싫었다. 왠지는 모르겠다.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전에도 병원에 가는 게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날은 유달리 더 그랬던 것 같다.
남편에게 가기 싫은데 날도 춥고 그냥 집에 있을래 라고 하자 남편은 그래도 미리 예약해둔 약속이니 가자고 했다. 남편은 이제껏 성과가 없었음에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티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나 혼자 죄책감 + 미안함에 시달렸다. 내게 한 번도 부담감을 주거나 실망한 티를 내지 않았던 남편. 그런 남편에게 " 그동안 우리 조금 더 둘이 놀다가 몸도 만들고 내년에 여유 있을 때 노력해보자 "
라고 밝은 목소리로 가볍게 건넨 뒤 병원에 도착했다. 도착 후 아침부터 채혈하니 몇 시간 뒤 병원에 다시 오라고 했다.
병원의 분위기는 언제나 무거웠다. 난임 병원의 대기실은 대화가 없다. 꼭 그게 서로 간의 예의이고 암묵적인 룰인 것 같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간호사들도 무뚝뚝하고 기계처럼 사무적이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꼭 그 무거움과 탁한 분위기들이 아기가 생기지 않아 몸부림 치는 나 자신이 꼭 죄인같이 느껴졌다.
반면 산과가 있는 아래층은 소음도 있고 부부들끼리 화와 기쁨 생기가 가득했다. 당연한 것들이고 축복인데, 그 축복은 내게 찾아오지 않으니 자격지심과 질투도 생기곤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 위층은 난임과 아래층은 산과였는데 일층에서 올라갈 때마다 한 번씩 아래층에 내리는 사람을 볼 때마다 한층을 더 올라가야 하는 내가 참 싫었다. 내가 스스로 만든 자괴감에서 끝없이 내려가 더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더 어두운 곳만 찾아가는 사람처럼 나 스스로를 가라앉혔다.
이런 자격지심 덩어리 같으니라고...
순서를 기다리며 잠시 앉아있을 때
당분간 병원에 오지 않을 테니 내가 죄인 같은 기분이 이제 들지 않겠구나 라며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내 이름이 불리고 몇 번 뵜다고 익숙해진 원장님 앞에 앉고 몇 초의 정적이 흘렀을까 ' 테스트기는 해보고 오셨나요? '라고 물으셨다. 그게 무슨 의미지? 의문이 들어 ' 네? 아니요..? ' 하고 되물었다.
" 임신이네요 축하합니다. "
그 무거운 공간에서 몇 초의 정적을 깨트린 건 남편이었다. " 와! " 정말 큰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에 웃음이 나오고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약간 민망하기도 했다. 피검사 결과 임신이 맞고 피검사 수치도 좋아서 다음 주에 아기집을 보러 오라고 했다.
정말 단 하나의 기대도 임신을 확인하러, 기대하러 온 것이 아니었는데.. 정말 극적인 순간에 열매가 맺혔다.
단, 몇 분 사이에 마음이 붕 뜨고 말았다. 완전한 실감은 하지 못했지만 우리 부부 둘 다 입은 씰룩 대고 있었다.
' 아가야 드디어 우리한테 와준 거니? '
우리가 드디어 고대하던 부모가 되는 첫걸음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