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

by 민예

사설 모의고사에서 4등을 했다. 장학금으로 100만 원을 받았다. 경추통으로 시험에 응시하지 않으려 했으나 연인의 권유 덕분에 공돈을 벌었다. 친구로부터 고등학교 동창이 장학금 명단에서 내 이름을 보고 놀랐다고 전해 들었다. 작년에 치른 모의고사 합해서 가장 높은 성적이다. 별다른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푹 쉬니 감이 잡힌 듯싶기도 하다. 자신감을 얻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모의고사는 말 그대로 모의일 뿐 실전이 아니다. 작년에도 모의고사 성적에 기세등등했다가 본고사에서 무너졌다. 다시 제대로 겸손하게 공부해야 한다.


학원에서 설명회를 들었다. 작년 독학 방식에 문제점이 있었는지 검토하고 혹 필요하다면 인강을 들을 생각이었다. “과연 제대로 기출문제를 풀고 있는가?” 너무도 당연한 말인데도 당연하게 와닿지 않았다. 신규 강사인데 강의를 들어볼지 고민이 들었다. 부원장과 상담했다. 작년 모의고사와 본고사 성적의 괴리가 고민이라고 말했다. 강의 결제를 유도할 것이라는 예단은 빗나갔다. 이 정도 성적이면 강의가 필요 없어 보인다고 답했다. 한 번의 시험 점수로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말라며 충분히 실력이 있으니 자신감을 회복하라고 한다. 학원 상담이 아닌 심리 상담을 받고 나왔다.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기출문제 분석을 다시 시작했다.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그간 공부를 하지 않아서 기억에서 사라진 것도 있지만, 시선이 달라짐을 느꼈다. 이렇게 글을 읽어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부원장의 조언과 달리, 인강을 듣기로 마음먹었다. 최대한의 투입을 해야 후회 없는 수험생활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장학금 받은 거에 그간 모은 돈을 더해 프리패스를 결제하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자신이 결제하겠다고 하셨다. 돈을 드린다고 하니 그러지 말라고 극구 사양하셨다. 완고하신 아버지를 우회하여 어머니께 대신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언제 출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식(食), 주(宙) 외에 더는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다.


영어학원 강사 일을 시작했다. 소득처는 시험 이후에 찾는 게 본래 계획이었다. 꽤 괜찮은 조건에 공고가 올라와서 기대 없이 지원해봤다. 하루 10시간 공부해도 빠듯할 수 있겠다는 걱정이 되었으나, 외려 돈을 벌지 않는 게 공부에 방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양희은 선생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성인이 되면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한다. 다른 목적을 위해 나의 생계를 부모에게 위탁하는 건 미성년으로 족하다. 내 밥벌이하면서 공부도 열심히 해야지. 의류 매장에서 일을 하며 피아노를 치는 나의 단짝이 새삼 존경스럽다. 면접에서 고3 모의고사 문제 시연 강의를 했다. 원장은 다른 면접자도 남았지만 보지 않더라도 당신이 가장 실력이 뛰어나니 바로 다음 주부터 일을 나오라고 했다. 자신도 배울 점이 있을 것 같으니 언제든지 조언을 해달라고 했다. 친절한 고용주를 만난 듯싶다. 병오년의 시작이 쁘지 않다.


오랜만에 그를 만났다. 그간 차마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나누었다. 굳이 안 해도 될 말은 하나 싶었지만 이제는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직접 겪지 않은 일인데 불필요한 고정관념을 씌우나 염려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떳떳해지고 싶어서라도 그래야 했다. 사회생활을 할수록 도덕의 선이 희미해짐을 느낀다. 어린 시절의 불편은 괜한 치기였고 적당한 너스레를 떨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나는 나고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 거다. 하지만 그러지 말라고 제지하지 못한 나 역시도 같은 부류일 수 있기에 깊이 사죄한다. 도덕성과 사회성이 충돌하는 경우, “쟤 왜 이렇게 진지해?”라는 비판을 듣더라도 “그렇게 말하면 안 돼.”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에게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 있다. 수년 전, 그와 함께 하늘로 떠난 다른 이를 추모한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일을 계기로 그와 오래 우정을 나누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 같다. 우리는 고인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썼다. 어떤 내용을 적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의 감정만은 선연하다. 당신과 말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는 자책. 당신이 생전 고통을 잊고 하늘에서 편히 쉬었으면 하는 바람. 그와 나는 슬픔을 소비하지 않고 존중을 담아 당신을 애도했다. 그도 당신도 이곳과 저곳에서 평안했으면 한다. 힘든 시기를 지나는 모두가 무사히 아픔을 이겨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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