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에도 나는 펜을 쥐어든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 하루의 끝에서,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글을 쓰기 위해. 그렇게 수첩에 채 마르지 않은 잉크를 꾹꾹 눌러 담는다. 언제나처럼 계획 없이 써 내려가는 오늘의 글. 이 밤의 끝을 적실 마지막 잉크는 나의 마음이기를.
어느 날이었다. 문득 펼쳐 본 앨범 속 나는 참 환하게도 웃고 있었다. 서서히 돌아오는 그때의 기억에 입가에 미소가 어리었다. 하지만 올라가던 입꼬리는 사진 속 미소의 반도 미치지 못하고 그쳐 버렸다. 그날의 기억은 되돌아왔지만 그날의 감정은 돌아오지 않았기에. 그 순간 나를 웃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유난히 좋았던 날씨도, 맛있는 식사도,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순간들도, 그 모든 것들의 모든 기억이 눈앞에 선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그날의 미소를 불러오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간은 불공평하게도 앞으로만 달려간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지금 이 순간도 영영 돌아오지 않을 테니. 익숙함에 젖어 흘려보낸 순간이 소중했음을 뒤늦게 깨닫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일까.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아마 내일까지도 비슷하게 흘러갈 나의 일상에서 어떤 순간은 너무나도 특별해서, 굳이 애쓰지 않아도 오랜 시간 나를 밝혀 주곤 한다. 그런데 정작 지금 이 순간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했던 당시의 일상이라는 것이 서글프다. 꼭 특별한 음식을 먹거나 특별한 곳을 가지 않아도, 함께라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던 그때의 우리가 그랬듯이.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글에 남아있는 나는 모두 그 자체로 나를 이루어 시간을 초월한다. 이제는 그리움으로조차 남아있지 않은 너를 나는 여전히 사랑한다. 어리고 철이 없던 과거의 나는 시간을 넘어 지금의 나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해준다. 힘들고 발을 내딛는 것이 두려워 고개를 파묻었던 그때의 나를 지금의 내가 팔이 으스러질 때까지 안아준다.
알맞은 단어를 알맞은 자리에 남길 때, 그 글에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감정이 담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내 감정들이 수놓은 꽃밭 그 어딘가에서 나 자신을 찾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