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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Jun 26. 2024

수련의 청순한 마음

잔잔한 연못에 해가 떠오르며 찰랑찰랑 나를 깨우는 바람, 난 수련이라고 해. 지금 막 노란 꽃술이 기지개를 켜며 하얀 꽃잎을 수면 위에 닿을 듯 말 듯 펼쳤어. 향기에 유혹된 벌과 딱정벌레 같은 곤충들이 화분을 듬뿍 머금은 내게 다가오네. 청아한 내 하루가 시작되었어. 누가 날 본다면 물속 줄기가 보초 서듯 밤새 공주를 지키는 왕국 같을 거야. 아침햇살이 비치자 한 뼘 크기의 동그란 녹색 잎들은 무도회 무희처럼 춤을 추며 맑은 공기를 뿜어내지. 볕이 뜨거워지는 오후가 되면 난 잘 시간이야! 내 꽃잎이 상하니 꽃을 오므렸어. 귀한 아이의 피부가 상할 것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으로 아침까지 꿀잠을 재우지. 그러나 아침마다 일어나서 공주처럼 꽃을 보살피는 건 며칠뿐이야. 사나흘 뒤에 씨앗을 맺으면 내 아이들을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해.

수련

사람들은 내가 별이 떨어져서 꽃이 되었고 내가 사는 곳은 요정이 산다고 믿었어. 하양, 분홍, 빨강, 보라색의 다양한 꽃이 피는 연못 참 아름답지 않아? 그런데 이 연못은 처음부터 이렇게 맑지는 않았어. 엄마와 함께 있던 넓은 호수에서 씨앗으로 떨어져 나올 때 내 시련이 시작되었지. 무더운 여름 장대비에 떠밀려 작은 연못 질척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로 겨울을 보냈어. 봄이 되어 뿌리를 내렸을 때,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햇볕도 들지도 않았고 비에 떠내려온 각종 쓰레기 더미에서 자랄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지. 영양분과 공기를 받아들이며 뿌리를 뻗었는데, 잠잘 틈이 없었어. 줄기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서 물 위에 작고 동그란 잎을 띄우던 날, 야호하고 소리를 질렀어. 내 잎은 거친 호흡을 내쉬며 연못을 괴롭히던 인과 질소는 물 밖으로 날려 보내고 신선한 산소를 물속으로 들여보냈지. 그러자 흙탕물 같던 연못이 서서히 맑아지고 다른 생물들도 내 곁에 모여들기 시작했어. 컴컴한 진흙탕 속에 뿌리내렸어도 살기 힘들다고 좌절하거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엄마처럼 내 왕국을 만들어 냈다고.

연꽃

사람들은 내 꽃이 며칠 내내 일찍 잠드는 걸 보고 잠자는 연꽃으로 부르는데 이해할 수 없다고. 난 잠꾸러기도 아니고 연꽃도 아니야. 연꽃은 연근이라 부르는 구멍 뚫린 뿌리가 줄기를 타고 물 위에 잎을 곧게 세우지. 난 뿌리에 구멍이 없는 대신 잎에 공기주머니가 있어 물에 떠있어. 그래서 내 잎은 다양한 생물들에게 뜨거운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쉼터이자 안전한 피난처가 되었어. 우린 생김새는 달라도 묵묵하게 연못을 맑게 하는 연못 지킴이야. 뜻을 같이하는 친구가 있으니 힘들어도 서로 의지해서 외롭진 않아. 우리에게 자리를 내어준 연못을 받아들이고 서로가 할 일을 할 뿐이지. 난 봄부터 가을까지 꽃을 피우는데, 내 아이들에게 엄마가 나에게 주었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 행복을 느끼도록 보듬어 주고 있어. 설령 힘든 곳에 가더라도 지금을 떠올린다면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 의지를 세워 나갈 수 있을 거야. 수련이란 이름만 보고 숨겨진 우리 노력을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이렇게 내 주변을 맑게 하는 이유는 한 가지야. 이 연못을 누군가 청소해 주겠지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곳은 항상 더러울 수밖에 없어. 내 곁에 다른 생명들도 이곳에 살 수 없게 될 거야. 결국 나와 내 주변을 지키려면 청소부를 자처하고 맑은 공기를 뿜어주는 연못의 허파가 되어야 했어.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넓히려고 하천과 호수 그리고 습지를 메워가는 걸 어떻게 생각해? 그렇게 자연과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나와 사람들은 자라날 씨앗과 아이들에게 맑고 아름다운 연못을 물려줄 수 없게 될 거야. 우리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남들 보기에 공주처럼 청아한 꽃이 아니야. 현재를 지켜내려고 애쓰려는 '청순한 마음'이야. 너희들도 같은 마음을 품고 살지 않을래?

수련 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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