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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Jun 24. 2024

독불장군 뽀리뱅이

안녕? 난 뽀리뱅이야! 경상도에선 봉우리를 뽀리라고 불러. 거기에 가난뱅이처럼 뱅이를 붙인 건 기다랗게 멀대처럼 자라 작고 노란 꽃을 몽쳐 핀 걸 얕잡아 본 거야! 다른 이들은 보리밭에 불쑥 솟아난 날 보고 보리뱅이라고 부르기도 해. 국화과이지만 국화처럼 무리를 이루지 않고 홀로 겨울을 넘겨 살아. 나름 강하고 뼈대 있는 집안의 풀이라고. 나물과 약을 귀하게 여기는 이들이 날 박조가리나물이라 부르는데, 애정이 담긴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나도 그들의 건강을 빌어주지. 너희는 남을 존중한 만큼 자신도 사랑받는다는 것을 아니?

뽀리뱅이

난, 하얀 솜털을 달고 스무 개 남짓한 풀씨 형제들과 태어났어. 엄마는 말했지 "너희는 꽃을 두 번 품게 될 거야. 가을엔 어린잎을 겹겹이 펼쳐 푸른 장미꽃이 되고 봄엔 꽃대를 세우고 작지만 예쁜 노란 국화꽃을 피우지." 그 이유도 알려주셨어 "너희가 이른 봄부터 땅속에서 새순을 키우려면 옆에 식물들과 다투며 커야 해. 그 북새통에서 남들보다 잘 자라는 것은 힘들어. 그래서 너희들도 서로 떨어져야 해. 추운 겨울 동안 봄을 준비하면 아웅다웅 싸울 필요가 없잖아?" 가을 아침 소슬바람에 씨앗 뭉치에서 떨어질 때 엄마가 크게 외쳤어 "할 일을 하다 보면 네 길이 보일 거야" 엄마의 배웅을 받으며 풀밭에 홀로 자리 잡았을 때 당황하지 않고 뿌리를 내리고 기다렸어. 나무들도 겨울을 준비하려고 움츠려들 때였지만, 사람이나 동물에게 밟혀도 견딜 수 있게 땅에 딱 붙어 싹을 냈지. 옆에서 강아지풀이 "지금 싹을 내면 어쩌자고 그러니?" 비아냥거렸지만 묵묵히 털옷 입힌 잎을 동그랗게 펼쳤어.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있으면 뿌리도 얼지 않고 갈증도 견딜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된바람을 타고 겨울이 왔어. 옆에서 꼬리를 흔들며 시비 걸던 강아지풀이 사그라졌어. 치렁치렁 덩굴을 뻗으며 위협하던 나팔꽃도, 풀씨를 내게 튕겨 보낸 봉숭아도 바짝 말라버렸지. 물론 나도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어. 꽃처럼 아름답던 푸른 잎은 점점 붉고 검게 변해갔지. 내 곁에서 겨울을 맞이한 질경이와 계란꽃이 말했어 "이제 우린 견디기만 해도 돼!" 그러나 난, 그들과 다른 준비를 해야 했어. 높이 자랄 힘을 모아두고 풀씨가 날아갈 수 있게 보풀 옷을 지어야 했지. 우리 셋은 여러 번 지나는 사람에게 밟히기도 했지만, 견뎌내며 서로를 위로했어. 친구들이 있어서 힘이 되었지. 따뜻한 봄날, 장미 닮은 잎에서 남들보다 빨리 줄기를 뻗어 올렸어. 키 작은 질경이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데, 씩 하고 웃어주었지. 내 줄기는 텅 비어있는데, 동물이 나를 먹으려고 하면 하얗고 끈적한 액체가 나와서 동물들이 날 피하지. 설령 줄기가 부러져도 아물어서 다시 자랄 수 있어. 이건 소와 토끼에게 매번 뜯기는 계란꽃도 부러워하는 거야. 엄마 바람대로 겨우내 준비한 것들이지. 겨울이 없었더라면 난 봄이 정말 즐겁지 않았을 거야!

눈 위를 뚫고 싹을 틔운 봄꽃들도 대단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어도 겨울을 버틴 날 봐. 비렁뱅이, 게으름뱅이, 주정뱅이처럼 고깝게 뽀리뱅이라고 부르고 싶니? 사람들도 낮춰 부르던 말이 있잖아! 물건을 사고판다고 장사치, 그림 그린다고 환쟁이, 민중의 지팡이에게 짭새, 연예인을 부르는 딴따라.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고 불러줘. 내 나날살이는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어. 힘껏 올린 줄기 끝에 두 번째 꽃을 피워야 해. 그리고 내 풀씨들을 바람에 띄우기 전 내 겨울 이야기를 해줄래. 검붉은 잎으로 동동 떨 때 날 견디게 해 준 엄마의 말 "할 일을 하면 네 길이 보일 거야!" 내 아이들이 서로 떨어져 있더라도 독불장군처럼 자신의 길을 찾는 모습을 그려본다.

뽀리뱅이 꽃과 날아가는 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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