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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Jun 22. 2024

메꽃의 충성

내가 누구냐고? 난, 들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수수한 메꽃이야! 사람들이 날 나팔꽃으로 잘못 부르곤 해. 꽃만 봐서는 누가 봐도 비슷하니 애써 모른 척 넘어가긴 했지만, 따뜻한 인도에서 건너와 겨우 한해를 버티는 나팔꽃만 예뻐하고 화초로 가꾸는 것은 아주 못마땅해. 겐 바람둥이처럼 새벽에 몰래 파랑, 빨강, 하양꽃을  피운다고.  난, 누가 돌보지 않아도 겨울 견뎌내고 뜨거운 낮에 오직 분홍 꽃만을 피운다고. 조심성 없이 잎부터 펼쳐놓고 보는 나팔꽃과 달리 땅속뿌리줄기에서 나온 덩굴줄기가 무엇이든 칭칭 감고 올라가서 햇볕을 보고 천천히 잎을 펼치지.  아주 작은 힘만 써서 줄기는 연약하고 동물이 잎을 먹지 못하게 쓴맛도 만들어내지 않았어. 꽃을 피워 씨앗을 만드는데 연연하지 않는 대신 뿌리에 힘을 모아 땅속 터전을 만들었지. 그것이 내가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이야.

메꽃

하루는 옆에 있던 개나리가 시비를 걸었어. "야! 너 나를 감아타고 내 머리 꼭대기에서 꽃을 피웠는데 그거 치우지 못하겠어?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여긴 내가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던 곳이라고!" 난 힘없는 세입자가 된 것처럼 말했지 "지금은 좀 어렵고 겨울이 오기 전에 떠날게요. 햇볕을 좀 나눠서 써요" 말이 안 통한다 생각한 개나리는 치렁치렁 내려뜨린 줄기에서 잔뿌리를 뻗더니 내 자리를 밀쳐내기 시작했지 "이래도 치우지 않을래?" 하고 구박했지만, 개나리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어. 난 도시와 농촌 그리고 바닷가 가리지 않고 살 수 있을 만큼 억척스럽고 뿌리가 잘려도 살아날 수 있거든. 게다가 봄에 피는 개나리와 달리 여름 꽃을 피워. 그래서 벌과 나비를 놓고 싸우는 것도 아니야. 또 칡이나 등나무처럼 의지했던 고마운 나무를 자라지 못하게 심하게 괴롭히지도 않거든. 결국 어떤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버텼더니 고깝게 보던 개나리도 어쩌지 못하고 날 무시하기로 했나 봐.

갯메꽃 (바닷가에서 자란다)

그런데 더 큰 걱정거리가 하나 있어. 농부들이 날 무척 싫어하는데, 내 뿌리가 밭에 들어가면 좀처럼 밭에서 나가지 않거든. 추운 겨울도 견디지만, 줄기와 뿌리를 뽑아내어도 잔뿌리로 다시 살아나지. 밭작물에 피해를 주는 것은 아는데 나도 양심이란 게 있어. 그래서 먹을 것 없던 옛날부터 지금까지 뿌리와 잎 그리고 꽃까지 사람들 식탁에 아낌없이 내어주고 있어. 전쟁과 흉년으로 배고프고 힘든 사람들의 서글픔을 나도 함께 나누고 싶었던 거지. 그 맘 몰라주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는데 어느 날 들려온 아이들이 노랫소리.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호미 들고 괭이 메고, 뻗어가는 메를 케어, 엄마 아빠 모셔다가 맛있게도 냠냠" 아이들 동요 소리에 뻗어가는 날 알고 있구나!' 반가운 마음에 울컥 눈물이 났어. 그러다가 잔잔하게 허전한 마음이 올라왔는데, 무엇이었을까?

나팔꽃

나와 닮은 화초, 나팔꽃! 참 아름다운 건 나도 알아. 그도 내 친척이거든. 그래도 난 오랜 세월 이 땅에서 견뎠는데 괄시받는 것 같아 서러웠어. 그래서 날 제대로 봐달라고 떼쓴 거야.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난,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날 돌보고 있었던 거지. 꼿꼿이 버틸 힘없는 덩굴줄기로 악착같이 남을 붙잡고 올라가지 않으면 볕조차 쬘 수 없어. 개나리 옆 곁방살이할 때도 구박을 당해 서럽기도 했고 시시때때로 농부가 나를 몰아내려 했어도 끈질기게 살아낸 나를 보았어. 아이들 동요 소리 뒤에 남겨진 허전한 마음은 엄마와 아빠를 떠올린 아이들 마음이 너무 부러웠던 거야. 나팔꽃처럼 사람들이 날 좋아했으면 바랬지만, 농부들을 괴롭히게 된 처지가 사랑받기 어렵다는 것은 알아.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것은 어렵고 이미 굳어진 마음은 쉽게 바꾸기 힘드니까. 남의 관심에 기대려 한 것은 어리석은 생각 같아. 내가 날 보듬지 않으면 누가 날 사랑하겠어? 내 꽃말 '충성'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남의 마음에 들게 날 맞추라는 게 아니었어. 내 여리고 착한 참마음을 정성 다해 사랑하라는 뜻이 담겨있었어. "메꽃! 그동안 고생했어! 자 이제부터 널 사랑할게. 차렷! 나에게 경례! 충성!"


                     

메꽃 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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