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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Jun 21. 2024

길잡이 질경이

"난, 사람 발길 따라 길에서 자라서 길경이, 질경이라고 불러. 사람 눈에는 밟혀도 살아남아 사람 흔적 좇아 퍼져가는 억척스러운 잡초이지." 옆에서 내 혼잣말을 듣던 국수나무가 혀를 찼다. "나처럼 볕을 쫓아야지. 사람을 따라다니다니! 넌 바보구나!" 그래, 나도 내가 바보 같아. 경운기 바퀴에 잎이 납작해져서 한동안 시름시름 아파하며 씨앗 품던 엄마도 한스럽게 말했지. "너희들은 나처럼 살지 말라!" 나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었지. 그런데 어느 날 길을 지나던 심마니가 엄마 머리 위에 있던 우리들을 꾹 하고 밟았어. 그의 질척한 장화 바닥에 형제들과 딸려가서 어딘지 모르는 곳에 나를 떨궜어. 어떻게 해? 여긴 어딜까? 형제들은 어디에 있을까? 외롭고 무서워져서 거친 사람 발길도 그리워졌어. 나 참 바보 같지?

해가 바뀌고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어. 아! 봄이 오는 것 같아. 오랜 겨울을 참고 버티느라 지쳐버린 나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세상을 향해 돼지귀를 닮은 잎을 쫑긋하고 펼쳤어. 아직 사느란 바람이 으스스 몸을 떨게 했지만, 내 호기심을 이기진 못했지. 여긴 어떤 곳일까? 주위를 둘러보니 하늘은 보일까 말까 아마도 깊은 숲에 들어온 것 같아. 내가 있는 자리는 좁아서 사람이 다닌 흔적이 별로 없는 오솔길이야. 엄마와 살던 곳은 사람과 짐승 그리고 경운기, 트랙터가 자주 다니는 넓은 둑길이었는데 여긴 너무 조용했어. 다행히 소리를 지르면 들릴거리에 형제들이 보여서 너무 반가웠지. 그리고 사람도 경운기도 트랙터도 보이지 않자, 야호하고 환호성을 질렀어. 여긴 내가 그리던 그곳이구나! 엄마도 우리를 보시면 기뻐하실 거야. 

질경이

가끔 지나가는 야생동물들이 나를 훑고 지나갔지만, 평온한 하루하루가 지나갔어. 날은 따뜻해지다가 장마가 와서 오솔길이 잠시 물에 잠기기도 했지만,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지. 벌써 가을이야. 난, 꽃을 피웠고 씨앗이 맺기 시작했어. 그런데, 태어날 아이들에게 우린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해줄 이야기가 별로 없어 아쉬웠지. 그러던 어느 날 해가 지고 땅거미가 찾아든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어. "여긴 어디지? 도대체 길을 찾을 수가 없네?" 소풍을 나온 선생님과 아이들이 길을 잃은 것 같아. 그렇게 당혹해하던 선생님이 나를 발견하고 외쳤어. "얘들아 여기와 봐! 여기 질경이가 있어." 땀범벅이 된 아이들이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나에게 달려왔지. "선생님 길을 찾았어요?" 선생님이 반갑게 말했어. "얘들아 질경이가 있으면 길이 있단다. 질경이는 길을 따라 자라거든" 아이들이 흩어져서 여기저기에서 외쳤어 "선생님 여기도 질경이가 있어요" 아이들이 내 형제들을 찾은 거야. 선생님은 "이젠 마을로 내려가자." 말하며 아이들과 기뻐하며 숲을 떠나갔어. 

난, 내 아이들에게 해줄 말이 생겼어. "우린 길에 밟히는 길경이가 아니야. 사람들이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알려주는 푸른 신호등이란다. 거센 파도에도 바다를 비추는 등대처럼, 깜깜한 하늘에서 길을 안내하는 빛처럼 우린 땅에서 길을 찾아주는 안내자야. 엄마는 당신처럼 살지 말라고 하셨지만, 엄마 역시 우리에게 삶을 열어준 안내 자였던 거지." 바보처럼 사는 것 같아도 진짜 바보는 아니었어. 우리의 영혼은 맑아서 한이 많은 사람의 넋이라고도 불러. 그래서 밟아도 밟아도 다시 맑게 살아날 수 있었던 건지도 몰라. 난, 내 아이들이 나와 형제들처럼 이 좁은 길을 밝히며 스스로 푸른 신호등처럼 살길 바래. 남들이 바보라고 말해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 우리 꽃말은 발자취란다.

길 따라 피어난 질경이 하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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