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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Jul 16. 2024

익모초의 수호자게임

코끝에 척척한 바람이 달라붙더니 툭툭 떨어지던 빗방울은 장대비가 되어 냇물 가득 채우며 무섭게 흘러가고 있어. 난 두해살이 풀 익모초라고 해. 작년부터 엄마에게 물려받은 게임을 하고 있는데 지금이 가장 위급해. 하필 꽃 핀 날에 여름 장마라니! 누군가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에 내 잡도리를 남겨.

익모초 1미터를 훌쩍 넘겨 크기도 한다.

이 게임은 내가 씨앗이었을 때 엄마 이야기로 시작되었어.  처음에는 신기하고 즐거웠는데,  이러쿵저러쿵 엄마의 도움말이 귀찮아져 흘려듣게 되었지.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세상 밖으로 떨어지는데, 엄마가 "네 아이를 지켜라" 내게 외쳤어. 이 게임의 미션이야. 나도 아이인데 무슨 아이를 지키라고? 막막했지만 뿌리내리고 움과 싹을 터야 한다는 엄마 잔소리가 떠올랐어. 다행히 엄마가 남겨준 자리는 익숙해서 뿌리 내고 터 잡기에 성공했어. 움트고 나서 땅에 붙어 마주 보고 있는 동그란 싹을 내밀었어. 곁을 보니 가을의 막바지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했지만, 초록세상은 노랑, 빨강으로 물들어가네? 이건 좀 위험해. 단풍을 보면 추위를 준비하라고 엄마가 누누이 말씀하셨거든. 이 게임의 다음 실마리를 찾았어.

아직 된 겨울을  보지 못했지만 볕을 받는 데로 뿌리에 힘을 쌓기 시작했지. 결국 숫눈이 쌓이기 시작했고 녹지 않는 눈 속에서 선택을 잘했다는 걸 알았지.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막판대장 겨울과 드잡이 할 수 있겠어. 숨죽이고 버티는 수밖에. 그런데, 이렇게 납작 엎드려 버티는 것만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아. 어린 순이 나기 전에 곤충과 동물이 뜯어먹지 못하도록 매운맛을 모아두라고 하셨거든. 덕분에 괭이잠도 못 자고 고비 늙어버렸지만, 겨우내 독한 힘을 챙길 수 있게 되었지.

봄이 되자 맘껏 새 잎을 내고 사각 줄기를 뻗고 싶어졌어. 긴 겨울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줄기. 봄의 햇살조차 망설였던 몸짓도 잠시, 날 막아섰던 겨울은 무너졌어. 온몸을 휘감는 전율에 감전된 듯 입을 다물 수 없었어. 말없는 침묵 속에서 이끼의 겉옷을 부끄러움 없이 벗어던지고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지. 겨울의 허물 위에서 난 눈이 뜨거워졌어. 늦부지런을 떨지 않아도 개울 건너 아이만큼 자라서 우산살처럼 잎을 펼쳤어. 이 게임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지. 그런데 엄마는 봄 가뭄도 견뎌야 하지만, 여름 장마는 피해서 꽃을 내라고 신신당부하셨지. 엄마 말을 잘 들은 형제들은 꽃을 내지 않았는데, 난 그 말을 무시하고 꽃을 피웠지.

익모초의 꽃말은 모정

그리고 이야기의 출발점이 된 지금, 늦장마가 이어지고 있어. 지금쯤 벌과 나비가 줄 서도 시원찮은데, 마수걸이도 못하고 떠내려갈 걱정을 하다니 미칠 것 같아. 엄마 말을 듣지 않은 후회가 밀물처럼 몰려왔지만, 물렁 팥죽처럼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자주색 꽃잎을 오므려서 신이라는 신은 다 찾으면서 버티는데, 천운이었는지 작달비가 멈추고 하늘이 갰어. 난 천당과 지옥을 오간 롤로코스트를 탄 듯 기진맥진해졌어. 날 찾아온 벌과 나비가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 귓등으로 흘려듣던 날 보면서도 지며리 하게 잡도리를 알려주셨던 엄마생각에 울컥했지. 한숨 돌리고 생각해 보니 날 보면 아이들이 제 멋대로 간다 해도 말릴 수는 없을 거야. 그들의 삶이니까 존중해야겠지. 그래도 도움이 될 거라 믿고 잔소리처럼 귀에 못 박히게 내 이야길 해야겠어. "청개구리 아이들아! 늙다리 도움말이란다!" 엄마가 전해준 수호자 게임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모정'이고 내 꽃말이지.  어때? 아이들 각자가 풀어가는 수호자 게임 보고 싶지 않아? (to be continued)

  익모초 군락의 꽃과 씨앗, 익모초는 씨앗 맺은 그 자리에서 떨어져 군락이 형성된다.

-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가 삶에도 있다면 삶을 게임에 비유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 같다.

- 엄마에게 좋은 풀, 익모초가 아이에게 365일 집중해야 하는 게임을 권하다니 처음엔 좋아하겠지만... 글쎄. 막판대장 겨울이나 장마보다 상대하기 힘든 것이 제 자신이란 걸 깨달을 테니까.

- 잡도리 : 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우는 의미가 있어서 게임의 공략집이란 말을 대신했다.

- 튜트리얼 같은 게임 용어를 시작마당, 가르침판 같은 우리말로 바꾸어 쓰고 싶었는데 이해도가 떨어져서 삭제했고 미션도 임무라는 말로도 써보았지만, 입에 붙은 게임 용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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