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한 기다림과 기대는 노력이 아니다
씨앗이었던 내가 움과 싹을 트고 한 송이 꽃을 피운 것을 누군가는 기다림이라고 말할지도 몰라. 나 또한 그렇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꽃을 피워놓고 보니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어. 지금 내 모습은 반드시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쏟은 후에 부족한 나머지조차 내가 채운 모든 것이야. - 동자꽃에게 기다림이란 -
씨앗이었을 때 어땠는지 알아? 움틀 수 있을까 곁을 보았더니 땅 위로 올라가려고 번호표 뽑고 줄 서있던 아이들이 많았지. 좁은 틈바구니 속에서 경쟁하듯 싹을 내밀었다가 충분한 볕과 영양을 얻지 못해서 사라진 애들도 봤어. 오직 그것을 견뎌내야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지. 그렇게 누군가는 싹을 내고 자리를 잡았지만, 난, 겨울잠에 들었어. 낮이 밤보다 길어지면 움틀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으니까. 돌이켜보니 말도 안 되는 일었지. 그런데 내게 운이 찾아왔어. 배고픈 멧돼지 가족이 먹을 것을 찾느라 긴 주둥이로 얼어붙어있던 땅을 뭉텅뭉텅 뒤엎어 놓으면서 너른 공간이 생긴 거야. 작년 가을부터 싹을 내고 버티던 개망초와 냉이 그리고 달맞이꽃이 날벼락을 맞았지. 그들은 뿌리가 완전히 뽑히지 않았으면 살아나겠지만, 내가 그들 걱정할 처지는 아니라서 누가 자리 잡기 전에 재빨리 움과 싹을 텄어. 긴박한 순간이었고 다행히 숲 속 반그늘은 내게 딱 알맞은 자리라서 남보다 앞서 자랄 수 있었지. 누가 보면 숲에선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었겠지만, 사느냐 죽느냐 전부가 걸린 초초한 순간이었는데, 기회를 찾아 행동했기에 지금 날 볼 수 있는 거야.
무더운 여름, 드디어 주황색 꽃을 피워냈어. 하지만 가루받이까지 해내려면 무더위를 견뎌야 해. 힘들게 피운 꽃이 시들어 버리면 안 되잖아! 눈앞에 닥친 일을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은 무모한 짓이야. 그래서 아침마다 잎에 돋아있는 작은 털에 이슬을 모아두었다가 목이 마르면 털을 비틀어서 수분을 짜내어 마시곤 해. 딱정벌레나 거미도 그들만의 방법으로 혹독한 사막에서 이슬을 모아 살아간다고 하니 보잘것없는 일은 아니겠지? 난, 여러 해를 살기에 이런저런 준비를 했어도 쓸 수 있는 힘은 많지 않아. 동물들이 싫어하는 맛을 내거나 벌레들이 달려들지 않게 할 순 없었어. 게다가 겨울을 견딜 수는 있지만, 새로 시작하는 아이들은 나처럼 상황을 엿보며 자랄 기회를 스스로 얻어내야 하지. 그래서 경쟁이 심한 들판을 피해 조금 더 높이 올라 자리 잡게 된 거야.
그런데, 요즘 겨울은 더 이상 춥지 않고 여름도 더욱 뜨겁게 변하고 있어. 우린 지금보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할지 아니면 이곳에서 더위를 견딜 수 있게 맞춰갈지를 선택해야 돼. 내 씨앗은 춥지 않으면 봄이 되어도 깨어나지 못하고 깨어나도 갈증을 참지 못한 우린 여름을 견디지 못할 거야. 민들레나 달맞이꽃처럼 미리 싹을 내어 겨울을 보내고 여름이 되기 전에 서둘러 꽃을 피울 수 있으면 살아날 수 있을까? 하지만, 내겐 맞지 않는 옷이고 가기 어려운 길이지. 기다려서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지만, 나머지 채울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몸이 뜨거워지면 수분을 내보내서 열을 낮추고 잎을 비틀어서 볕을 적게 받게 하는 것도 한계가 있거든. 그렇게 달궈진 땅에서 빨아드린 수증기가 다시 폭우로 쏟아지고 온전하던 땅이 밀려 산사태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지. 해와 비, 정말 소중한데 어찌 날 이렇게 힘들게 할까? 그런데 남 이야기처럼 흘려듣는 너희! 나와 처지가 다르지 않을걸? 너흰 어찌할지 궁금해. 난, 기다릴 수 있어. 내 꽃말이 기다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