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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Jul 26. 2024

분꽃의 쉼

해가 중천에 떠있는데 고개 숙이고 있는 날 보면 스스러운 거라 지레짐작하는 이들이 많아! 하지만 난 아주 정렬적인 분꽃이야! 게으름뱅이라서 해 질 녘에 바빠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낮잠 자는 호랑이에게 게으름뱅이라고 말할 수 있어? 해가 기울면 내가 어찌 변하는지 들려줄까? 내 고향 잉카제국은 태양신을 숭배했는데 태양 힘이 가장 약한 날에 풍년을 소망하며 인티라이미 축제를 열어왔어, 정월대보름 지신밟기처럼 발로 땅을 굴러 땅을 깨우고 태양이 도는 방향으로 행진을 해. 땅별 반대편 남미와 달리 여기선 여름이라서 태양이 가장 약한 밤에 축제를 열어. 노랑, 빨강, 보라가 어우러진 화려한 꽃을 피워 고향의 향수를 밤새 즐겼으니 당연히 낮에는 꽃을 접고 쉬어야지.  

밤이 좋은 분꽃

꽃잎을 오므리는 낮, 내게 귀한 시간이야. 여름부터 가을까지 피고 지고를 반복하며 이런저런 일이 생기지만, 이 시간은 짊어진 짐을 내려놓고 내 안에 다름을 찾아. 해가 있고 땅이 있으며 그 안에 살아있는 산이를 바라보며 그들이 있음에 내가 있음을 깨닫게 돼. 내 쉼은 한 울타리에서 평온한 마음을 느끼는 것이야. 아무리 즐거운 축제라고 해도 걱정과 고민 속에 갇혀 보낸다면 제대로 쉴 수가 없겠지. "피곤해", "졸려", "더 쉬고 싶어"를 입에 달고 살 거야. 쉴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더 잘 쉬었을까? 그런데 쉴 줄 모르면 깨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힘이 채워지지 않고 피곤할 뿐이지. 한울에서 바라보면 언걸 때문에 생긴 허수한 마음이나 고깝던 분노도 누그러지더라. "그랬구나!" "힘들었겠네" "잘 참았어!" 하며 날 위로하고 다독이는 거야.

그런데 좀처럼 풀리지 않는 고민이 생겼어. 고향에선 여러해살이풀이지만 이곳은 겨울을 견디기지 못했거든. 그런데 무슨 일인지 날씨가 따뜻해지니까 내 곁을 지키던 소나무숲이 시나브로 사라지고 도토리 열매를 맺는 졸참, 신갈나무가 들어섰는데, 그들도 열매를 잘 맺지 못하더라고. 너스레가 아니야! 나도 낮이 너무 더워 저녁까지 궁싯거리다가 벌레와 나방을 보고도 귀둥대둥 자버렸어. 낮엔 고독을 즐겼어도 우린 모두 한울로 이어져있었는데,  밤낮이 헝클어지니 무인도에 떨어진 것 같아 외로웠어. 

당당해 보이기만 하는데, 어딜 보아 소심해 보일까? 

예전 일인데, 늦은 오후에 꽃이 피면 어머니들을 날 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하고 서둘러 저녁밥을 지었지. 당시에는 시계가 드물었으니 밥 할 때를 알려주는 날 얼마나 반갑게 보던지. 게다가 내 속씨앗으로 흰 가루를 내어 분 화장을 했지. 이래저래 우울할 틈도 없이 인기 만점이었다고. 지금은 1분 1초가 틀림없는 시계와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고 효과가 다양한 화장품이 있어서 사라져 가는 느린 소통이었어. 그런데 그거 알아? 어머니는 떨어져 있어도 서로 안에 있다는 믿음을 씨앗에 담아 시집가는 딸에게 전해주셨어. 그 마음을 받아들여 주변을 바라보면 결국 우린 한 그릇 안에 있는 거야. 

과거를 떠올리며 시집간 딸이 힘들어진다면 엄마는 어떤 마음이 들까 처지를 바꿔 생각해 봤어. 나 또한 어찌해야 하는지 알지. 밝게 마음먹어야 수나로울 거야. 따뜻한 겨울이라면 여러 해를 살 수 있을 테니 내겐 좋은 일이라고 마음먹었어. 깜깜한 밤에도 숫기가 좋았으니까 낮에 동무를 사귀어도 나쁘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내 쉼이 달라지진 않을 테니까. 된바람 부는 돌비알이라도 어우렁더우렁 살아가는 거지. 스페인이 멸망시킨 잉카의 축제를 돌아보는 것은 올뉘를 살기 위함이지. 그래서 닥친 처지에서 잠시 떨어져 보는 거야. 현실에 너무 젖어 있다가 힘들고 맛적어지면 좋았던 시절만 떠올리게 돼. 옛 것을 배워 새것을 얻는다는 말도 있잖아? 어때?  이제 환한 낮에 설뚱하게 보지 말고 스렁스렁 웃어주지 않을래? 

여름비에도 꿋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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