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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Jul 31. 2024

침묵의 여로

혀보다 무서운 독은 없다

뜨거운 여름, 얼굴이 붉다 못해 검게 익도록 뛰놀던 아이가 하얀 이를 드러내놓고 웃는 아이 같은 꽃, 바로 나 여로야. 여러 해 사는 난 자주색 꽃을 피웠지만 하얗거나 푸른 꽃을 피우는 친구도 있어. 우린 독이 강해서 뿌리에 기생하거나 잎을 뜯어먹으려는 벌레들이 날 피하고 있지. 살충제로 쓸 정도이니 산마늘이나 원추리처럼 나물인 줄 알고 뜯었다간 큰일 나. 그런데 독이 약이 되듯 나를 견딘 검은 제비꼬리나비 애벌레에겐 안전한 터전이 되었어. 쥐방울덩굴에 살고 있는 꼬리명주나비 애벌레도 같은 까닭이지. 독사가 제 혀를 잘못 깨물어서 죽었다는 웃긴 이야기가 있지만, 우리끼린 독이 서로를 지켜주는 소통일 뿐이야. 누군가를 해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날 지키려고 만든 것이니까 말이야. 

여로

소중한 물과 햇볕도 지나치면 뿌리가 썩거나 잎이 타들어가잖아. 그러니 나를 지키려는 걸 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혀로 내뱉는 말도 마찬가지야.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욕설과 거짓말로 마음에 상처를 입히잖아. 나도 작년에 푸른 여로와 다퉜어. 그때는 꽃을 처음 피울 때라 나도 혈기가 넘칠 때였지. 푸른 꽃을 핀 여로에게 한마디 했지 "넌 나와 다른 꽃을 피웠네? 잎 같으니 벌과 나비가 찾아들기나 하겠어? 그래서 열매나 제대로 맺긴 하겠느냐고?" 내 말을 들은 푸른 여로가 발끈해서 "검게 태워먹은 꽃을 핀 너 따위가 뭐라고 나불대는 거냐?" 나도 감정이 격해져서 서로 대화를 하지 않게 되었는데, 보다 못한 박새 아저씨가 우리를 불러놓고 타일렀어."나와 너흰 같은 백합과 풀인데, 서로를 비난하면 대하기 불편해지고 불행해질 뿐이야. 생각해 보렴. 꽃이 지면 서로 닮은 잎만 남게 되지 않니? 우린 한가족이야!"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맞아! 우린 잎이 거의 비슷해. 꽃 색깔이 다르다고 뭐라고 떠든 것이 창피해졌어. 바로 푸른 여로에게 사과했지 "내가 경솔했어. 내가 바로 잡으려면 어떡해야 할까?" 다행히 푸른 여로도 바로 응해 주었어. "나도 심한 말을 했지. 앞으로 서로 존중하자" 깨달은 게 있는데, 부러진 줄기가 아무는 것보다 상처받은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내 독은 약재로 쓰이는데, 독은 약과 통하기 때문이야. 그런데 혀는 마음을 드러내는 붓인데, 독한 마음을 먹고 혀로 뱉어진 말은 결코 약이 될 수 없어. 독설은 정말 해독하기 어려운 독이야.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보이는 일은 어쩔 수 없이 듣고 보는 것이지만, 말만은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니 내가 조심하면 되는 거였어.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는 것보다 침묵이 현명한 행동인 것 같아. 내 곁을 지나가는 독사를 보더라도 강한 독을 갖고 있는데도 조용할 뿐이야.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것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변의 냄새와 향기 그리고 맛을 느끼려는 조심스러운 행동이지.  만약 우리가 말하기 전에 뱀의 혀처럼 주변을 돌아보면 어떨까?

푸른 여로

올해도 푸른 여로가 꽃을 피웠어. 여러 나비들이 그 주변을 맴도는 것을 보니 나름대로 많은 애를 썼어. 내가 잎을 흔들며 환호하자 푸른 여로도 빙긋 웃으며 화답했지. 말없는 응원이지. 칭찬과 응원은 지체 없이 표현하는 것이 좋지만, 말은 뜸이 필요하더라고. 말하는 것은 나 하나라도 그것을 듣는 것은 이 숲 전체가 듣게 되지. 옛말에 세 번을 생각한 뒤에 말하라고 했어. 내 꽃말은 진실이야. 거짓과 비난이 경호원처럼 둘러싸인 세상에 진실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라. 설령 듣지 못해도 괜찮아! 내 침묵에는 진실이 담겨있으니까.

박새. 여로와 박새는 백합과 식물로 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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